공 병우 상 제정에 필요한 자료 문건과 공 박사님 추모의 글을 올리는 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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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이대로 옮김) 2009년 10월 19일 14시 16분에 남긴 글입니다.
공병우 박사의 업적과 한글기계화 당면 과제

공병우 박사의 업적과 한글기계화의 당면 과제(1)

집현전 학술대회 주제 발표 논문
  
송현(시인. 본지 주필)  


▲송현(시인. 한글문화원장)   © 브레이크뉴스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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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공병우 박사의 한글 기계화 분야 업적

1)머리말
2)공병우 박사의 한글기계화분야 업적
(1)실용적 한글타자기를 발명하다

(2)각종 한글기계 글자판 통일을 이룩하다
(3)과학적인 한글 글자꼴 기본을 정하다
(4)공병우 한영타자기 등을 개발하다
3)공병우 정신
(1)빨리빨리주의
(2)정직--내가 한글타자기발명가가 아니다
(3)글은 쉽게 써야 한다
(4)정의와 용기
(5)고집과 고독
(6)내식대로 살았다
(7)한글사랑과 자판통일
(8)발명정신
(9)지면서 이겨라
(10)박애정신

2. 한글기계화의 당면 과제

1)한글 표준자판 통일
2)현행 표준자판 실패 4대 요인
(1)비전문가들이 만들었다
(2)공청회 한 번 열지 않고 비밀리에 했다
(3)2개월 반 만에 졸속으로 만들었다
(4)허위보고서를 작성했다.
3)남북통일자판 제정 시 13가지 유의 사항
(1)글자판이 통일되어야 한다
(2)타자기 글자판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3)입력 속도가 빨라야 한다
(4)손가락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야 한다
(5)배우기 쉽고 치기 쉬워야 한다
(6)자모 벌수가 한글구성원리와 일치해야 한다
(7)자모 배열을 합리적으로 해야 한다
(8)손가락 기능부담이 합리접이어야 한다
(9)모아쓰기 특성을 살려야 한다
(10)한글 맞춤법을 지켜야 한다
(11)각종 구조가 통일되어야 한다
(12)기계공학적으로 합리적이어야 한다
(13)한영 겸용기계가 개발될 수 있어야 한다
(14)과학적 글자꼴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15)남북통일자판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3. 맺는 말
1)반드시 글자판 전문가들이 만들어야 한다.
2)졸속으로 하면 절대로 안 된다
3)반드시 공청회를 열어서 수정 보완해야 한다.
4)반드시 보고서를 정직하게 써야 한다.

1.머리말
공병우 박사는 코끼리이다. 공병우 코끼리는 조선 개화기부터 근 1세기를 이 땅에 살다 간 엄청 큰 코끼리이다. 공병우 코끼리를 가까이서 본 사람도 있고 멀리서 본 사람도 있다. 그러나 너무 커 제대로 본 사람이 많지 않고, 제대로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는 안과 의사요, 한글기계화의 아버지요, 맹인의 아버지요, 사진작가요, 컴퓨터 연구가요, 생활 혁명가요, 민주투사요, 애국자요, 한글운동가요, 발명가이다. 그래서 어느 한 면이라도 제대로 아는 것이 쉽지 않고, 온전하게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나의 캔버스에 그리기는 부담스러운 너무 큰 코끼리이다.(나라사랑. 외솔회)

2)공병우 박사의 한글기계화 분야의 업적

(1)실용적 한글타자기를 발명하다.
1949년에 쌍초점 원리를 발명하여 고성능 한글타자기를 만들었고, 이것이 한글정보화의 초석이 되었다.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인터넷 최강국이 되는 바탕에는 초성, 중성, 종성의 세벌식으로 구성된 과학적인 한글과 자음, 모음, 받침으로 구성된 공병우식 3벌식 타자기가 있기 때문이다.

(2)각종 한글기계 글자판 통일을 이룩하다.
한글타자기에서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각종 글자 생산 기계들 간의 수직적 글자판 통일을 이룩하였다. (한글기계화개론. 송현. 청산출판사 1982년)

(3)과학적인 한글 글자꼴의 기본을 정립하다.
공병우식은 한글 글자꼴의 구조대로 닿자(초성글자)와 홀자(중성글자) 받자(종성글자)를 각각 1벌로 하는 세벌식이기 때문에 가독성과 판독성이 높은 합리적인 글자꼴의 터전을 마련하였다.(한글자형학. 송현. 디자인출판사. 1985년)

(4)공병우 한영타자기를 개발하다.
수동. 전동. 전자식 한글기계에서 한글과 영문 대소문자를 완벽하게 두 나라 글자를 찍을 수 있는 공병우 한영타자기는 세계적인 발명품으로 한글의 과학성과 한글기계화의 우수함을 입증하였다.

3)공병우 정신

(1)빨리빨리주의-시간은 생명이다.
1906년 음력 12월 30일. 살을 에는 강추위에 산모는 임신 8개월의 몸을 쉬지도 못하고 소에게 여물을 주기 위해 여물통을 들고 외양간에 갔다. 외양간 앞에서 여물통을 놓고, 비명을 지르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때 시어머니는 방 안에 있었지만, 귀가 어두워 며느리의 비명 소리를 듣지 못했다. 며느리는 혼자서 애를 낳았다. 그때 마침 외출에서 돌아오던 시아버지가 금세 난 핏덩이와 산모를 방으로 데리고 갔다. 산모는 방에 가자마자 애 하나를 더 낳았다. 엄동설한에 외양간에서 난 애는 살고, 방안에서 난 애는 나중에 죽고 만다. 외양간에서 난 팔삭동이가 자라 나중에 공 병우 박사가 되었다. 남보다 두 달이나 빨리 세상에 나왔다. 이 탓인지 공박사는 일생동안 <빨리빨리>를 생활의 신조 제 1조로 삼고 눈코 뜰새없이 숨가쁘게 살았다.

공 병우 타자기도 이 빨리빨리주의 산물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쁜 글씨 타령을 할 때인데도 공박사는 글자는 알아볼 수 있기만 하면 된다면서 속도를 선택하였다. 공박사의 삶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전설 같은 일화들이 수없이 많다.

공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방의 문지방을 톱으로 썰어낸 것도 청소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것이고, 사과 괘짝을 두 개 놓고 침대를 만든 것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한 것이고, 5분 이상 시간을 쓰는 이발소에 가지 않은, 낮에 하는 결혼식에 가지 않는 것도, 멀쩡한 양말의 위쪽 고무줄을 가위로 잘라서 신는 것도, 미리 약속하지 않고 오는 손님을 되돌려 보내는 것도, 넥타이를 매지 않는 것도, 한때 화장실에도 소형 냉장고를 설치한 것도, 그 유명한 공안과 개업 몇주년 기념식 한번 하지 않는 것도 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함이었다. 기행에 가까운 이런 일화의 바탕에는 공병우 박사의 시간은 생명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공병우 박사는 철저한 실용주의자요, 철저한 합리주의자였다.

내가 공병우 한글기계화연구소에 부소장으로 일하던 어느 날 공 박사에게 무슨 영수증을 타자로 찍어서 올렸다. 그런데 공 박사는 그 영수증을 들고 말했다.

"송 선생, 이것 누가 타이핑했어요?"
"새로 온 타자수가 했습니다.혹시, 무슨 잘못이라도 있습니까, 박사님?"
"아주 큰 잘못이 있어요!"

알고 보니 타자수 딴에는 보기 좋게 하느라고 '영수증'이라고 찍지 않고, '영 수 증"이라고 글자와 글자 사이를 보기 좋게 띄워 찍은 것이 화근이었다. 공 박사는 '영'자와 '수'자와 '증'자 사이를 넓히기 위해서 사이 띄우개를 사용한 횟수를 세어본 뒤에 시간 낭비했다며 따졌다.

“송 선생이 왜 타자수 교육을 이렇게 시켰어요?! 쓸 데 없이 사이 띄우개를 사용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는지 따져 보시오! 앞으로 타자수 교육을 똑바로 시키도록 하시오!"

(2)정직-내가 한글타자기 발명가가 아니다
공 병우 소년이 의주 농업학교 2학년 2학기 때 ”나의 희망과 농업학교“란 주제로 작문을 썼다. 여섯 장 쯤 되는 긴 글을 썼다. 교장 선생과 학교 행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제출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한참 고심하다가 '에라 모르겠다'하고 제출을 하였다. 일주일 뒤 작문 시간에 와따나베 선생은 작문공책을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는데, 공 병우 소년 것만 주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똑똑히 들어요, 여러 학생들의 글은 천고마비 어쩌고 저쩌고 하는 내용의 죽은 글들이거나 남의 흉내를 낸 글들이었는데, 공 병우 군의 글은 살아 있는 진짜 글이었어요. 내가 한번 읽어 보겠어요, 나중에 공 군의 글은 '압강일보'에 실을 테니, 그때 다시 한 번 잘 읽어 보도록 해요."

나중에 안 일인데, 와따나베 선생은 반마다 다니면서 읽어주고, 마침내는 교무실에서 선생님이 다 모인 자리에서도 읽었다. 그 자리에 교장도 있었다. 이 사실을 안 공 병우 소년은 앞이 캄캄하였다. 기숙사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눕고 말았다. 퇴학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사흘 뒤에 일본인 교장 선생에게 불려갔다. 교장은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공 병우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앞으로 1년을 더 다녀야 졸업을 하지만, 이미 너는 졸업생과 다름 없는 실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너는 더 이상 이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다. 네가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란 것을 너희 보통학교 교장 추천서를 보고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의사가 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야. 마침 경성 사립 치과 전문학교가 있는데, 내가 추천서를 써 줄테니 거기 가서 공부하는 것이 어때? 마침 그 학교 교장이 나와 아주 친한 친구야."

교장 선생을 비판한 작문 한편이 도리어 교장 선생에게 옳게 평가를 받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뜻밖의 행운을 만나게 되었다. 정직한 작문 때문에 공 병우 소년의 운명이 바뀌게 된 것이다.

공병우 박사가 당신 자서전 머리말에 자서전을 쓰는 네 가지 이유를 밝혔다. 이 중에 하나가 당신이 “한글타자기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나이 80이 넘은 지금 내가 살아온 길을 더듬어 보기로 한 데에는 크게 네 가지 뜻이 숨어 있다.(중략) 둘째는, 나에 관한 기사가 책 또는 잡지나 신문에 가끔 나오는 것을 볼 때마다 사실과 다른 점이 더러 눈에 띄었기에 이를 바로 잡고 싶은 것이다.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거나 잘못 기록된 자료를 바로 잡지 않고 두면, 엉뚱하게 그것이 진실로 둔갑할 우려가 있어, 내 스스로가 진실을 밝혀서 바르게 기록해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다. 보기를 들면 “한글 타자기의 시조 공 박사는.... " 라고 운운한 글을 더러 보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른 잘못된 표현이다. 이미 나보다 먼저 한글 타자기를 만든 분들이 있었다. 가령, 내가 고성능 한글 타자기를 최초로 발명했다고 하면 말이 되지만, 고성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으면 사실과 다르다. 그래서 부정확하게 알려져 있는 과학적 사실을 정확히 밝히고 싶은 것이요”

김 흥기 박사는 “웨슬리신학의 조명에서 본 미주 한인 이민과 선교 백년의 역사적 의미”라는 논문 제3부에서 한글타자기 발명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최초로 한글 타자기를 발명한 사람은 로나녹크대학에서 상업을 전공한 이원익(Wonic Leigh)으로 전해지는데, 그는 1913년 84개 키로 이루어진 최초의 타자기를 발명했다. 그 후에 송기주(Keith C. Song)는 공병우 타자기의 원조인 송기주 타자기를 발명하였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25세 때인 1925년 도미하여 텍사스 주립대학교에서 학사학위(B. S.)를 받고 1926년 시카고의 랜드 맥넬리 회사에서 지도 제도원으로 일하면서 시카고대학교 대학원 과정을 이수하다가 뉴욕으로 갔다. 그래서 그는 시카고에 머무는 동안에는 시카고 한인감리교회의 교인이었고, 뉴욕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뉴욕한인감리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그는 시카고에 있을 때 한국 지도를 최초로 서구식 입체 본으로 제작하였으며, 한글타자기를 고안하여 7년 간 연구 끝에 1933년 뉴욕의 타자기 제조회사 언더우드(Underwood-Elliott-Fisher)와 제작에 합의하였다. 종전에 타자기가 있었으나 자판이 복잡하고 타자 열이 고르지 않아 실용성이 없었는데 언더우드-송기주 타자기는 42개 키로 현대체 한글을 고르게 찍을 수 있는 타자기로 각광을 받았다.

뉴욕한인감리교회에서 한글 타자기 개발은 송기주 이후에도 계속되어 1946년 해방직후 담임목사인 김준성 목사가 한국어와 영어가 동시에 쳐지는 한글타자기를 제작했으나 상업적으로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타자기를 개발했을 때 한국에도 그것에 못지 않은 한글타자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뉴욕한인교회70년사는 한글타자기의 선구자로 알려진 공병우 박사가 1940년대 뉴욕한인감리교회를 출석한 바 있고 김준성 목사와 교분이 있는 사이였다는 점을 근거로 공병우 박사의 타자기가 김준성 목사가 개발한 모델과 연관성이 있지는 않은가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실은 송기주가 귀국 후 공병우 박사가 발명권 양도를 교섭했는데 이를 거절했다. 그 후 6.25때 송기주가 납북된 후 그 방식의 타자기가 공병우 박사에 의해 시장화됐다.“

위의 공 박사의 고백과 김 박사의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나 최초의 한글타자기 발명가는 공 병우 박사가 아니라 재미 교포 이 원익 선생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잘 모른다. 정직하게 말하면 공병우박사는 “한글타자기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한글타자기” 혹은 “고성능 한글타자기”를 발명한 것이다.

(3)글은 쉽게 쓰자
공 병우 박사는 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을 기회 있을 때마다 했다. 그래서 글을 쓸 때는 항상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쉽게 써야 한다고 했다. 공 박사는 글을 쓰면 반드시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보여주면서 잘못이나 보탤 것이 있으면 “마음대로 지적해 달라”고 했다. 공병우 박사 연구실에서 일한 타자수는 누구를 막론하고 공박사의 글을 보고 오자나 빠진 글자 혹은 잘못된 부분을 고쳐준 경험이 많다. 타자수 뿐 아니라 손님에게도 당신이 초안한 글을 보여주면서 잘못이나 빠진 것이나 보탤 것이 있으면 지적해 달라고 하였다.

내가 공병우 한글 기계화연구소의 부소장으로 일한 지 서너 달 뒤였다. 어느 날 공 박사의 권유로 난생 처음 한글기계화에 관한 글을 한편 썼다. 앞부분을 몇 줄 읽어보시던 공 박사는 말했다.

"송 선생, 나는 이 글이 무슨 소린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이 글은 송 선생 같이 유식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보통 사람들을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글입니다."

나는 그 순간 기분이 무척 언짢았다. 나는 문단에 시인으로 이미 등단을 한 뒤였고, 또 그 동안 십 여년 가까이 국어 선생 노릇을 한 처지였고, 잡지나 신문 등지에 더러 글도 발표하는 문사로 자처하고 있었는데, 내가 쓴 글을 무슨 소린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내가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공박사가 말했다. "좀 쉽게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떫뜨럼한 기분으로 몇 군데의 단어와 수식어를 쉽게 고쳐서 공 박사에게 보여 드렸다. 공 박사는 몇 줄을 읽어보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나는 이 글을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군요. 이 글은 송 선생 갈이 유식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 지 몰라도, 보통사람들은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글입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는 것이 좋겠어요."

나는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꾹 참고 원고를 돌려받아서 쉽게 고친다고 다시 고쳐서 공 박사에게 보여드렸다. 공박사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래도 나는 이 글을 무슨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요. 내가 한 번 내 마음대로 쉽게 고쳐 드릴까요?"

"네. 박사님. 그렇게 해 주십시오!"

이틀 날, 내가 연구소에 출근을 하자마자 공 박사는 벌겋게 고친 원고를 내 앞에 내 밀었다. 붉은 볼펜으로 고친 부분이 더 많았다. 공박사가 고친 원고는 과연 쉽고 표현이 정확하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박사가 물었다.

"송 선생! 어떻습니까? 내가 마음대로 고친 부분과 송 선생이 처음 쓴 것과 어느 쪽이 더 알기 쉽습니까?"
"박사님께서 고친 쪽이 훨씬 알기 쉽고 또렷합니다. 감사합니다. 저에게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글을 쓸 때 큰 참고를 하겠습니다."

나는 그 뒤 여러 해 동안 공 박사에게 그런 애정 어린 글쓰기 지도를 받았다. 이런 의미에서는 공 박사는 나에게 한글기계화의 스승만이 아니라, 문장론 스승이기도 하다.

(4)정의와 용기
공 병우 소년은 열 네 살 때 의주농업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했다. 어느 날 밤 상급생 방에 불려갔다. 공병우가 방에 들어서자 별명이 멧돼지인 상급생이 다짜고짜 빰을 때렸다. 2학년 짜리 선배 별명이 멧돼지인데, 영문도 모르고 따귀를 맞은 공병우는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말했다.

“왜 때려? 내가 무슨 잘못을 했어?”
“건방진 게 그게 바로 네 잘못이야!”
멧돼지가 공병우의 배를 찼다. 공병우는 그 자리 꼬꾸라졌다. 숨을 제대로 못 가누고 있는 공병우에게 멧돼지는 계속 발길질을 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비틀대며 자기 방으로 돌아온 공병우는 생각할수록 분하고 억울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면서 멧돼지가 무엇 때문에 건방지다고 했는지 곰곰 생각해보았다. 공병우는 매달 서점에서 잡지를 사보았다. 멧돼지는 잡지를 빌려 달라고 했다. 처음 얼마 동안 빌려 주었다. 어느 날 잡지를 보고 있던 공병우에게 멧돼지가 뻣뻣하게 말했다.

“야 공병우, 이 책 좀 보자!”
말하는 투와 태도가 너무나 고자세였다. 목에 힘을 잔뜩 주고 말하는 것이 아니꼬워 잡지를 빌려주지 않았다. 그 바람에 멧돼지는 앙심을 품고 있다가 ‘하급생이 건방지다’는 이유로 공병우를 상급생 방으로 불러다가 상급생 여럿 보는 앞에서 마구 때린 것이다. 공병우는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분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면 할 수 없다! ”
공 병우는 주머니칼을 찾았다. 입술을 깨물면서 칼날을 폈다. 하얀 칼날이 반짝였다. 이를 앙다물고 눈을 부릅뜨고 상급생 방으로 달려갔다. 몸을 못 가눌만치 맞고 비틀거리며 돌아갔던 애숭이가 칼을 들고 상급생들이 방에 쳐들어온 뜻밖의 광경을 보고 다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칼을 든 손을 앞으로 내밀고 멧돼지 앞으로 다가갔다. 공병우 손에 들린 칼을 보고는 멧돼지는 겁에 질려 새파랗게 질렸다. 공병우는 멧돼지 얼굴에 칼을 들이댔다.

“야! 왜 나를 때렸어? 이유가 뭐야?”
칼날이 번뜩하였다. 금방 찌를 듯한 공병우의 다부진 태도를 보고 멧돼지는 새파랗게 질렸다. 칼을 휘두르기만 하면 피비린내가 나는 큰 사고가 날 것 같았다. 상급생들이 공병우를 밖으로 밀어내려고 했다. 공병우가 소리쳤다.

“다들 비켜! 내 몸에 손을 대거나 나를 가로 막는 놈은 누구라도 가만 안 둘 거야! 나는 퇴학도 좋고, 경찰에 끌려가도 좋다!. 그러나 아무 잘못도 없는 하급생을 구타하고 못살게 하는 놈은 아무리 상급생이라도 절대로 이제 내가 가만 두지 않겠다!”

공병우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하였다. 삽시간에 다른 방에 있던 학생들도 우루루 몰려왔다. 평소에도 하급생이 상급생에게 말로 대드는 일이 더러 있었지만 공병우처럼 상급생에게 칼을 들이대며 대드는 일은 처음이었다. 감히 상급생의 월권이나 부당한 행동에 대해 저학년 학생이 대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번뜩이는 칼날 앞에서 새파랗게 질린 멧돼지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내가 잘못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으마. 잘못했다.”

공병우의 칼부림 사건 뒤에 상급생이 하급생을 구타하는 악습이 사라졌다. 나중에 공병우 박사가 3벌식 한글 타자기를 발명한 뒤, 박정희 군사정권과 자판통일을 위해서 외로운 투쟁을 계속한 것도 공박사에게 정의감과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 때 미국에 잠시 여행하러 갔다가 여행을 도중에서 멈추고 돌아와서 한글사진식자기와 한글워드프로세서 등을 연구 개발하는 한편 민주투사가 되어 때로는 선봉에 서기도 하고 때로는 뒤에서 후원한 것도 다 공박사의 용기와 정의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5)고집과 고독
공 병우 박사를 고집불통이라고 하는 수가 더러 있다. 1965년 4월 11일자 한국일보에 “한국의 유아독존 10화”라는 연재물이 나오는데, 그것은 이름이 좋아 유아독존이지, 쉽게 말해 한국 사람들 중에서 이름난 고집쟁이 열 명을 차례로 소개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 승만, 최 현배, 양 주동 등이 등장했는데 공병우 박사도 그 속에 랭킹 6위로 끼어 있었다. 이에 대해서 공병우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덮어놓고 내 것이 옳다고 내세우는 이기적인 고집을 부린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신념을 밀고 나가는 것뿐인데, 사람들은 아마 나를 고집쟁이로 아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것도 어쩌면 남 보기에는 괴팍한 유아독존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공박사의 고집은 단순한 억지 중심의 고집이 아니다. 낡은 질서, 비과학적인 시스템, 잘못된 습관 등을 반대하고, 이를 바로잡고 계몽하기 위해서 부딪칠 때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데서 오는 고집이다. 공 박사는 일상 생활에서 참으로 많이도 부딪쳤다. 식당에 가서 식사 뒤에 음식이 남으면 싸오고, 넥타이 매지 않고, 사진 전시회 할 때 화환 일일이 돌려보내고, 약속하지 않고 찾아온 손님은 다시 약속하고 만나자고 돌려보내고, 한문자 명함을 받으면 반드시 한글로 써야 한다고 혼내주고, 당신의 생일잔치 해본 적이 없고, 종로 통 그 비싼 땅에 있던 한글 문화원의 사무실들을 한글문화 단체에게 공짜로 쓰라고 내주고, 시간 아낀다고 양말 고무줄 잘라버리고, 깍두기나 김치를 물에 헹구어 먹고, 딸의 데이트 도와주다 우연한 인연으로 청평호수가에 별장 짓고, 타자기 이야기라면 입에 거품을 물고 두 서너 시간 혼자 떠들고, 매일 아스피린 먹고, 방바닥에 호치키스 놓고 발바닥 운동하고, 공안과 옆 신도라는 일식점 아가씨 중심으로 키스 보급회를 만들고, 미국에서 콘돔 처음 보고 그 참 편리한 물건이라 싶어 잔뜩 사서 한국에 보냈을 때 세관에서는 공박사가 풍기문란하게 음란 기구를 사 보냈다고 통관 안시켜 주고....1950년대 미국 다녀와서 방문 문턱 자르고 간장독 부수고 사과궤짝으로 침대 만들고 방안에 양변기 만들어 넣는 등 별별 기행을 하였으니, 얼마나 많이 부딪쳤을 것이며, 그러는 가운데 얼마나 고집스러웠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렇게 고집스럽게 살아오는 동안 공병우 박사는 남들이 잘 몰라 그러지 참으로 고독했다. 그의 고독함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바로 그의 사진이다. 공박사가 사진을 처음 공부하자 가장 많이 찍은 피사체가 바로 달이다. 나는 공박사의 달 사진들 보고 공박사의 가슴 속에 쌓여 있는 고독을 금세 읽을 수 있었다. 내가 말했다.

“박사님 사진 중에 달 사진을 자세히 보면 공박사님의 고독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자 공박사님은 마치 보여 주면 안될 것을 들킨 사람마냥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아니, 송현 선생이 그걸 어찌 압니까?”
“문학평론가나 예술비평가들은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을 보고 작자의 내면 세계 심지어 무의식 속까지 꿰뚫어 보는 수가 있습니다.”

내 말을 신기한 듯이 듣고는 공박사가 말했다.
“송선생이 바쁘시겠지만. 내 달 사진에 대해서 지금 말한 요지의 글을 하나 써주세요. 내 사진집에 해설하는데 쓰겠어요.”
“예, 박사님!”
공박사가 미국에서 한글컴퓨터 사진식자기 등을 연구할 때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박사님, 80 고령으로 몇 해 째 미국에서 자취 생활을 하시니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이 점에 대해서 공박사는 다음과 갈이 말했다.
“내가 하는 짓이 보기가 딱해 하는 말인 듯하다. 물론 내 아내나 딸들은 나 혼자 자취를 해 가며 연구 생활을 하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지 않는다....... 나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처량하지도 않고, 짜증스럽지도 않다. 그야말로 나는 나의 고독한 시간을 즐기고 있다. 일하고 싶을 때 일을 하고 편리한 취사 시설을 이용하며 언제든지 먹고 싶을 때 원하는 대로 먹을 수도 있다. 정말 나의 고독은 즐거운 고독이다. 나는 진정으로 고독을 즐기면서 사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고요 속에 잠길 수 있어 좋고, 연구를 하는 데도 고독한 분위기가 안성맞춤이다. 80이 지난 뒤부터는 내 나름대로 쉬고 싶을 때 쉬고, 눕고 싶을 때 누워야 편하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실은 고독을 즐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6)나는 내식대로 산다
6. 25 전쟁이 한창일 때, 미국 언더우드 타자기회사에서 한글 타자기 제작 건으로 공병우박사에게 급히 미국에 와 달라는 초청장을 보내왔다. 공병우 박사는 부산에서 미군용기 편으로 36시간이 걸려서 미국에 갔다. 미국에서 공 박사는 타자기 건 외에도 안과계, 맹인계 시찰 등 일정이 바빴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처럼 흩날리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낙엽은 아니고, 낯선 물건이었다. 알고보니 콘돔이란 것이었다. 공박사 자신이 8형제였고,3남 6녀를 둔 가장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산아제한의 측면에서 큰 충격을 받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지 싶다.

“야,그것 참 신통한 물건이군 그래. 이런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도 잘 활용해야 애들을 많이 낳지 않겠구나. 애들을 너무 많이 낳아서 제대로 양육도 못하고 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 참 편리한 물건이구나!”

이런 생각을 한 공 박사는 콘돔을 잔뜩 사서 한국의 공안과 사무장 앞으로 보내면서 “이 편리한 물건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잘 활용하게 하시오”라고 일렀다. 조 사무장은 콘돔을 찾으러 세관으로 갔다. 세관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공박사님 같이 저명인사가 이런 풍기문란용 기구를 사서 보내시다니,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십니다. 이런 풍기문란용 기구를 통관시킨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풍기문란을 조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절대로 통관시킬 수 없습니다!”

공박사는 이 이야기를 호탕하게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송 선생, 풍기문란이라면서 통관을 안시켜주던 정부가 몇 해 안가서 산아제한을 강조하면서 전국적으로 무상으로 배포를 하더군요! 원 참! ”

오늘날은 콘돔은 전국 약방은 물론 심지어 다방의 화장실, 역 화장실, 고속버스 화장실, 심지어 도심지의 다방이나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음식점이나 유흥업소의 출입문 근처 어디서건 동전만 넣으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필수품이 되었다.

미국 여행에서 돌아온 공 박사는 생활 환경 개선 작업을 착수하였다. 그 첫 번째 작업이 집 밖에 있던 변소를 집 안 목욕탕으로 옮긴 것이다. 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빈정대었다.

"공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오자 미쳐 버린 모양이다."

이때 공 박사의 성급한 생활 개선은 장안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한옥 내부를 양옥 스타일로 고쳤으니, 종전과는 완전히 생활 양식이 달라졌다. 밖에 있던 변소가 안으로 들어오고, 수돗물을 뜰에 나가 길러 오던 것을 이제는 부엌에서 줄줄 나오게 하고, 거기다가 밥상을 나르던 것이 개선되었다. 상을 차린 곳에서 방 안까지 운반하려면 깊은 부엌에서 상을 차려 일단 마당으로 나갔다가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온 뒤, 안방 문을 열고 높은 문턱을 넘어, 안방 온돌방에 가져다 놓아야 하던 것을, 부엌에서 안방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도록 안방과 부엌 사이에 있는 벽에 구멍을 뚫었다...문지방도 톱으로 쓸어내고 말았다. 이번에는 장독대 차례다. 공 박사의 표적은 김치와 간장이었다. 김치를 담아 먹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채소를 그대로 먹으면 될 테고, 간장을 먹지 말고 소금을 먹으면 그만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공 박사의 눈에는 간장과 심치는 시간 낭비의 원흉이었던 것이다. 아침내 공 박사는 간장독과 김칫독들을 때려 부수고 말았다. 다음은 안방을 고칠 차례이다. 안방에다 사과괘짝을 들여다 놓았다. 가족들 중에 어느 누구도 왜 공 박사가 사과괘짝을 안방에 들고 들어가는지 눈치 채지 못했다. 설마 그것이 공 병우식 침대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시간을 절약한다는 생각에서 공 병우식 간이 침대를 만든 것이다.

공병우 박사는 1953년도에 미국엘 갔다 와서는 ‘유서는 젊고 건강한 때라 하더라도 미리 써 놓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80세에 들어선 해에 간신히 뉴욕에서 유서를 썼다. 정진우 변호사에게 착수금 150달러를 지불하고 맡겼다. 유서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생명이 위독한 병으로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동거 가족 또는 보호자는 다른 가족과 친척, 친구들에게 위독 사실을 일절 알리지 말고, 의사의 지시에만 순종할 것.

둘째, 만일 죽더라도 누구에게도 일절 알리지 말고, 장례식이나 추도식 같은 것을 일절 하지말고, 아래 적은 순서로 가능한 방법을 택하여, 시체를 처리할 것,

1) 시체 중에는 조직 또는 장기를, 다른 환자의 치료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적출한 뒤, 나머지 시체는 병리학 또는 해부학 교실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의과 대학에 제공할 것.

2) 위와 같이 할 수 없을 때는 사후 24시간 이내에 화장 또는 수장을 한다. 만약 법적으로 화장 또는 수장이 불가능할 때에는 가장 가까운 공동묘지에 매장한다. 단, 매장할 때에는 새옷으로 갈아 입히지 말고, 입었던 옷 그대로 값싼 널(관)에 넣어 최소 면적의 땅에 매장한다. 시체는 현장에서 100킬로미터 밖으로 운반을 못한다. 현 거주지로부터 100킬로미터 밖에서 사망하였을 때는 가급적 현지에서 위의 방법으로 처리한다. 여행 도중 바다나 강물에 익사하였을 때는 수장으로 삼고, 시체를 찾아내지 말 것,

3) 죽은 지 1개월 후에 가족, 친척, 친구에게 사망 사실을 점차 알릴 것. 만일 매장이 되었을 경우에는 화장한 것과 같은 경우로 알고, 누구에게나 묘지의 소재지를 알리지 말 것. 화장을 하였을 때, 남은 재를 몽땅 버리고, 조금이라도 어떤 곳에 남겨 두지 말 것.

셋째, 죽은 후, 나의 유형무형의 재산이 있을 경우는 신체장애자들, 특히 앞 못 보는 장님들의 복지 사업을 위해 쓸 수 있도록 가족과 내가 법적으로 지명한 집행인과의 협의에 의해 처분할 것.

1993년 년 10월 한글날에 정부는 건국 후 처음으로 한글 유공자 4명에게 훈장을 주었는데, 그 중에서 공 박사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주었다. 훈장 받기 전날 저녁을 마치고 헤어질 때였다. 공 박사가 문화원으로 도로 들어가시기에 내가 물었다.

"박사님, 오늘 댁에 들어가시지 않으십니까?"

내일 공 박사가 훈장을 받는 날이니까 오늘은 댁에 들어가서 주무시고, 옷도 양복으로 갈아 입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 박사는 문화원에서 주무시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튿날, 세종문화회관 한글날 기념식 전에 문화 훈장이 수여되었는데, 공 박사는 어제 저녁에 입고 있던 그 낡을 대로 낡은 푸른색 점퍼 차림에 평소 입던 그 푸른색 셔츠에 구두는 구겨 신은 채로 단상 위에 올라왔다. 예사로 본 사람은 이런 모습을 눈여겨보지 않았을 것이다. 공 박사는 평소에 입고 있던 낡은 옷 차림새 그대로 였고, 거기다가 평소대로 구두 뒤축은 구겨 신은 채였다.

(7)한글사랑과 자판 통일

평소에 공박사 머릿속에는 한글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자나깨나 한글을 생각한다. 우리 민족은 이렇게 훌륭한 것을 갖고도 소중하게 간수할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모른 채, 500년 간을 천대하며 보냈으니 답답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민족 문화를 고도로 발달시킬 수 있는 한글을 갖고 있으면서도 활용할 줄 모르는, 한자에 병든 지식층들이 초등학교에서 부터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고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 참 답답하고 안타깝다...나는 평소부터 한글 전용의 빠른 길은 일반이 즐겨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한글 기계화를 통한 길이라고 생각해 왔다. 한글 기계화가 이루어진다면 저절로 한글 전용이 된다고 믿고, 합리적인 세벌식으로 타자기 발명, 식자기, 한글 워드 프로세서 등을 개발해 왔다. 요즈음은 세벌식 한글 전자 타자기도 개발했다. 편리한 한글 기계가 자꾸 나오면 한글을 사랑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잠시도 한글의 기계화 문제를 잊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 일부 지식인들은 한글이 세계적인 글자라고 자랑은 곧잘 하면서도 실제는 천대를 일삼아 왔다. 나는 그 같은 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동지들과 함께 앞장을 서며 여생을 보낼 생각이다. 그 중에서는 한글 기계화를 위해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 .”

그래서 공 박사는 평소에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든 공안과는 망해도 상관없습니다. 다른 안과 병원이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3벌식 한글기계는 절대로 망해서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사실을 정부에서 모르고 도리어 천대를 하고 있으니 한글의 앞날과 이 나라의 앞날이 걱정됩니다."

(8)발명정신
공병우 박사는 한국판 에디슨이다. 공병우 박사의 발명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내게 공병우 타자지 회사를 다 맡기면서 공병우 박사의 발명품 족보를 내게 넘겨주었다,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분야에 걸처 수많은 발명특허 건수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실용적인 한글타자기를 비롯하여 한글과 영문을 함께 찍을 수 있는 한영타자기, 한글과 영문 대소문자를 같이 찍을 수 있는 한영 3단 타자기, 공병우텔레타이프, 공병우볼타자기, 공병우사진식자기, 중국주음부호타자기, 맹인점자타자기, 한손용 한글 워드프로세서 등에서 콘텍트 렌즈에 이르기까지 공박사의 발명특허 목록은 끝이 없을 정도로 많고 다양하다.

우리 나라 여자들 중에 쌍꺼풀 수술을 한 여자는 전적으로 공 박사에게 감사해야 한다. 왜냐면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쌍꺼풀 수술을 개발한 분이 바로 공 박사이기 때문이다. 공 박사는 쌍꺼풀 수술을 우리 나라 뿐 아니라 멀리 하와이까지 전파시키기까지 하였다. 공 박사가 1957년 미국 여행 길에 하와이에 들렸다. 하와이에는 이국 안과 학회 총무인 홈스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공 박사에게 물었다.

"공 박사님! 당신은 여자들의 눈을 예쁘게 하는 특별한 수술을 성공하였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예."
"어떤 수술입니까?"
"여자들의 눈꺼풀에 하는 간단한 수술인데 쌍꺼풀 수술이라 합니다."
"그 수술을 한 여자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한국에서 나에게 쌍꺼풀 수술을 받은 여성들은 대단히 만족해 합니다. 이 수술은 눈을 예쁘게 하고 싶어하는 여성들에게 날로 인기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공 박사님, 수고스럽지만 이곳 하와이 여성 중에서도 그런 수술을 받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공 박사님께서 그 수술을 시범으로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직 하와이에서는 그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아무도 없습니다."
"좋습니다. 홈스 박사께서 원하신다면 시범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튿날엔가 공 박사가 홈스 박사와 여러 명의 다른 의사들과 조수들이 보는 앞에서 쌍꺼풀 수술을 시범으로 해 보였다. 이것이 하와이에 쌍꺼풀 수술이 최초로 보급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만약 공박사가 박정희 독재 정권과 글자판 싸움하는데 그 많은 시간과 정력과 돈을 쓰지 않았다면,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연구하고 발명하였을 것이다. 공박사의 발명가적 재능을 타자기 자판 싸움하느라고 사장시킨 것은 공박사 개인의 불행은 물론이고, 이 나라의 불행이기도 하다.

9)지면서 이겨라
공병우 박사는 아주 겸손한 분이다. 연구소에 일하는 타자수나 병원에서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도 늘 겸손했다. 말씨도 겸손했고 몸가짐도 겸손했다. 아무리 어린 타자수나 여직원 심지어 손자뻘 되는 운전기사에게도 반말 하는 것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셋째 아들 뻘 밖에 안 되는 나에게도 처음 만나서 돌아가시기 까지 단 한 번도 반말을 한 적이 없고, 농담으로도 반말을 한 적이 없다. 내가 박정희 유신독재의 서슬이 시퍼럴 때 온갖 위협을 받으면서 자판 통일을 위한 투쟁을 할 때 공병우 박사는 내게 자주 이런 충고를 했다.

“송현 선생, 지면서 이겨야 해요”

내가 공병우 한글기계화 연구소 부소장으로 취임한 서너 달 뒤쯤엔가 내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표준자판 폐지 건의서를 제출했다. 청와대는 내 건의서를 과학기술처로 넘겼다. 과학기술처 장관한테서 나를 호출(?)하는 공문이 왔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와 싸울 각오를 단단히 하고 과학기술처로 갈 때 공 박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송현 선생, 오늘 과학기술처에 가서 절대로 흥분하지 말고, 과격하게 싸우지 마시오. 이길려고 하면 지기 쉬운 법이니, 지면서 이기는 것이 더 현명한 것입니다. 젊은 혈기에 뭘 집어던진다거나 책상을 뒤엎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마시오. 지면서 이겨야 한다는 말을 명심하시오.”  

(10)박애정신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는 장애자에 대한 인식이 무척 나쁜 편이다. 이에 대해서 공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침 출근길에 장님을 보고는 침을 뱉으며 “에이, 오늘은 재수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불구인 애가 무관심한 가족을 항해 악을 썼다 해서 달래기는커녕 오히려 “병신 육갑하네”로 윽박지르는 우리 사회의 병폐가 하루바삐 사라져야 한다. 세상 천지 어디에 병신의 모습이 우스꽝스럽다고 해서, 그 모습을 흉내내며 얼씨구 좋다 하는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보다 온전치 못한 장애자를 조롱하며 추는 이른바 병신춤이란 정말 불구자를 가슴아프게 하는 비인도적인 짓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수많은 발명품들은 대부분 신체 장애자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소리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실은 타자기의 발명도 그렇고, 담뱃불 붙이는 라이터도 신체 장애자들을 위한 것이라 한다.“

공박사가 1953년 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여러 가지를 깨알았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눈먼 이에게 희망을 주는 맹인재활 의학 분야이다. 공박사의 말마따나 그전까지는 “눈 치료만 할 줄 아는 안과 의사”에 불과했다. 일단 치료할 수 없는 환자에게는 손을 툭툭 털고 실명 선언만 하면 그만이었다. 미국에서 실명자에게 베푸는 각종 재활 프로그램에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동안 나는 눈먼 환자에 대해 너무 무지했으며, 마치 무슨 큰 죄를 저지른 사람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내게 온 환자 중에는 다른 병원에서 이미 실명 선고를 받고 온 사람도 많았다. ‘마지막으로 서울에 가서 공 박사의 진찰이라도 한 번 받아 보고 싶다’면서 논밭을 팔거나, 소를 팔아 가지고 병원에 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하늘에 무너지는 듯한 절망으로 울부짖는 이 실명자들 앞에 두고 의사로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그저 냉정하게 진찰 결과만 말해주고 자리를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만큼 나는 재활 의학에 백지 상태였던 것이다. 미국에서 재활 의학에 눈을 뜨게 된 나는 그제사 속죄하는 마음으로 내 재산을 다 처분해서라도 장님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곧 귀국했다. ”

공박사는 곧바로 서울 광나루 건너에 있는 천호동에 2천여 편 대지를 마련하고 ‘맹인 부흥원’을 설립했다. 여기서는 점자 타자기와 한글 타자기 등을 가르치면서, 장님들이 일반인들과 같은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장을 계획하였다. 맹인들이 사회에서 당당한 일꾼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꿈이었다. 공박사는 맹인부흥원을 본격적인 ‘맹인 재활 센터’로 만들기 위해서 일본, 대만, 홍콩 등지에 견학 여행을 하였다. 갖고 있던 부동산을 모두 팔았다. 그리고 일본인 전문가 기무라 씨를 초빙해서 건축과 특수 시설을 만들었다. 물론 기숙사 설비까지 갖춘 맹인 재활원을 만들었다.

공박사는 신체 장애자들을 위한 것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70년대 초반에 점자 타자기를 개발하였다. IBM 회사에서 만든 전동 점자 타자기는 2천 달러가 넘는 고가였다. 그래서 맹인들이 150달러 정도의 싼값으로 구입해서 간편하게 들고 다니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수동식 타자기를 한글과 영문으로 발명하였다. .. 맹인들을 위해 중국의 주음 부호 타자기를 개발하기도 해서 중화민국 장 경국 총통 비서실장으로부터 감사장과 선물을 받기도 하였다.

1995년 3월 7일 공박사가 돌아갔다. 그러자 어느 일간신문은 "공박사의 삶과 죽음"이라는 사설에서 이렇게 썼다.

"고집불통의 치열했던 외길 인생과 빈손으로 온 인생 빈손으로 허허롭게 돌아가는 도인 같은 공병우박사 죽음이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그는 정치인도 아니었고 인기를 좆는 유명인도 아니었다. 독학으로 공부해 안과 전문의가 되어 90평생을 의료사업에 종사했고 한글 사랑을 통해 나라 사랑에 기여하는 치열한 삶을 알았던 그가 또 한 번 온몸을 바쳐 마지막 헌신을 했다. 그의 고귀했던 삶과 죽음을 나의 일상 속에서 새롭게 하자."

공병우 박사는 삶뿐 아니라 죽음도 공병우식이었다.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도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만한 장기와 시신은 모두 기증하라." 이 바람에 죽은 지 이틀이 지나서야 텔리비젼 뉴스 시간을 통해 공박사의 부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대한민국 국무회의는 3월 14일 공병우 박사에게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키로 의결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공병우식으로 보면 다 부질없는 짓이다. 공박사가 가장 염원하던 것은 글자판 통일이었다. 현행 엉터리 표준자판을 폐지하고 과학적인 3벌식으로 글자판을 통일하는 일이다. 당신 살아생전에 글자판 통일은커녕 글자판 통일될 기미도 보이지 않았으니,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빨리빨리주의>로 한 세기를 파란만장하게 살다가 간 공 박사는 과학과 애국이 한데 어우러진 삶을 산 우리시대 마지막 큰 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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