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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2013년 10월 26일 01시 16분에 남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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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외솔상 실천부문 수상자 (이봉원) 인사말


(이 인사말 속에, 국어운동학생회 초창기 역사와 고운이름자랑하기 행사를 시작하게 된 사연이 있어 이 곳에 옮깁니다. -가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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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맙습니다. 먼저 저를 이 자리에 세워 주신 박종국 위원장님을 비롯한 심사위원님들, 그리고 최홍식 이사장님, 성낙수 회장님을 비롯한 외솔회 회원님들, 또 축사를 해 주실 김석득 선생님 그리고 이 자리에 귀한 시간을 내어 참석해 주신 내빈과 친지 들, 모든 분께 고마움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저로선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외솔상을 받아서도 그렇지만, 실은 지금으로부터 38년 전 바로 오늘 이 곳에서, 제가 국어운동 후배인 아내와 혼인을 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정부는 한글날 행사를 여기 세종대왕기념관 뜰에서 몇 해 동안 했는데, 바로 그 잔디밭에서 제가 결혼을 했습니다. 그게 계기가 돼, 기념관 측은 강당을 예식장으로 이용할 생각을 하게 됐고, 몇 해 안 가, 이 곳 기념관은 장안에서도 매우 인기 있는 예식장으로 소문이 나서, 지금까지도 그리 이용이 되고 있는 줄로 압니다.

  저는 그 날 축가 순서에서 노래 대신에 다른 말씀을 녹음테이프로 들었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외솔 육성 훈민정음 서문 봉독 듣기 45초)

  외솔 선생님은 한글학회 이사장의 자격으로서, 지금도 그런 관례가 지켜지고 있지만, 한글날 정부 행사장에서 훈민정음 서문을 봉독하셨습니다. 저는 제 결혼식에서 친구들의 축가보다 이 말씀을 더 듣고 싶었었나 봅니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고등학교 때 시작됐습니다. 당시 제가 다닌 학교엔 말본 시간과 문법 시간이 따로 있었습니다. 저는 말본 반을 택했고 그때 외솔이란 분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대학에 입학한 뒤 몇 달 안 되었을 때, 정부는 우리말 용어와 한자 용어가 양립하는 것을 더는 용납할 수 없다는 듯, 학술용어 특히 과학용어를 한자 용어로 통일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예를 들어, 잎파랑이는 엽록소로, 흰피톨은 백혈구로, 붉은피톨은 적혈구로, 그때까지 함께 쓰던 우리말 용어를 없애고 한자 용어만 허용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로 통일하려면 쉬운 우리말 용어를 택하는 것이 옳은 일일 텐데, 저는 도저히 정부의 이런 처사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물어물어 한글학회를 찾아갔습니다. 지금 한글회관이 위치한 바로 그 자리에, 당시는 꽤 너른 마당이 있었고, 그 안에 일본식 2층 목조가옥이 한 채 있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외솔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됩니다. 지금은 다 고인이 되셨지만, 문제안 선생님이나 유제한 선생님도 그때 뵈었고요. 외솔 선생님은 제가 찾아온 뜻을 말씀 드리자, 소리없이 크게 웃으시며 저를 맞아 주시더군요. 그리고 저의 평생 지침서가 된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이란 책을 주셨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우리말 사랑하기 운동을 학내에서 시작해 범국민운동으로 발전시키고 싶은데, 지도교수로 누굴 모셔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께서는 “언어학과에 허웅이가 있어.” 하시며 찾아가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허웅 선생님을 몰랐습니다.

  그렇게 돼서 1968년, 제가 대학 2학년이 되던 해 3월 16일에, 저는 제가 공부하는 심리학과 한 강의실에서 스무 명의 학생과 몇 분의 교수님 그리고 한갑수, 문제안 선생님을 모시고 ‘국어운동 횃불 점화식’이란 것을 열었습니다. 국어운동이란 말은 외솔 선생님께서 주신 책 속에 적혀 있는 것이었는데, ‘나라말을 깨끗하게, 쉽게, 바르게, 풍부하게 하여, 이 좋은 말들을 널리 펴는 운동’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한글만쓰기가 선행돼야 한다고도 하셨습니다.

  창립식이 끝난 뒤, 저는 창립선언문을 전국 주요 대학과 고등학교 학생회장들에게 우송했고, 저희 대학신문에는 선언문 전문을 광고로 실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 친구였던 고려대학교 박노용 군을 찾아가 의논을 했더니, 금방 뜻이 맞아 고려대에서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고려대 국어운동학생회가 창립 기념 강연회를 여는 날, 동국대 이대로 군이 연락을 해 와 고려대 앞에서 처음 만났고, 동국대도 곧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우연하게도 이 두 사람은 전공이 농업경제학으로, 둘 다 농촌운동에 뜻을 품고 있었던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초기에 뭉친 우리 세 사람은 모두 전공이 국어학은 아니었습니다. 그 뒤로 참여한 연세대학교는 국어국문학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첫 해엔 이렇게 네 개 대학이 결성했는데, 이듬해에는 전국에서 열일곱 개 학교로 늘어나서 큰 힘이 됐습니다. 제가 오늘 상을 받게 된 것은 아무래도 근래 제가 한 일들보다 학생 때 제가 한 일에 비중이 더 주어졌을 듯하여, 당시 얘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국어운동학생회가 창립된 첫 해 한글날에, 그때까지 조직이 끝난 몇 개 대학은 공동 행사를 마련했습니다. 우선 먼저 ‘국민들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발표하고, 동시에 ‘대통령께 드리는 건의문’을 채택했습니다. 이 건의문에는 한글전용법에서, ‘당분간 필요하면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을 삭제해 달라는 것과 앞으로 대통령께서 공식 서명을 하실 때는 반드시 한글로 해 달라는, 두 가지 제안을 담았습니다. 그런데 한글날 아침에 고려대학교 교정에 학생들이 모여 집회를 열려는데, 경찰이 미리 알고 와서 행사를 막았습니다. 그 바람에 거리 계몽 등 이 날 계획은 차질이 생겼고 반쪽 행사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날 석간과 다음날 조간신문에 저희가 한 일이 매우 크게 실렸습니다. 특히 조선일보는 3단 기사로 실었는데, 당시는 신문지면이 적어 3단 기사는 그야말로 대서특필인 셈이었죠. 기사 제목이 ‘경찰 제지로 해산 당한 한글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언론 보도를 마침 진해에서 접한 대통령이 자신의 문화고문인 노산 이은상 선생님을 청와대로 불렀습니다. 그러자 노산께서는 대통령의 의중을 미리 알아채고는, 말보다는 글이 조리가 있겠다 싶어, 한글전용의 필요성에 관한 글을 적어 가지고 가서 대통령을 만나셨습니다. 이 사실은 그 날 저녁 때 소공동에 있는 한 식당으로 노산 선생님이 한글 단체 어르신들을 부르셔서 함께 식사를 했는데, 저도 학생 대표로 참석을 했고, 그래서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1968년 3월에 정부는 국무총리 이름으로 ‘앞으로 5년 안에 우리의 일상생할에서 한글전용을 완전히 실시하겠다’는 발표를 합니다. 신문 잡지까지 강제로 그리하겠다는 뜻입니다.

  대통령도 이때부터는 한글만 쓰기를 몸소 실천했습니다. 공식 서명은 물론 청와대 각 방의 문패도 한글로 바꾸고, 그 해 12월에 복원한 광화문에도 자신이 쓴 한글 현판을 달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학생 활동을 감시하던 경찰도 그리고 언론도 학교 당국도 우리 동아리를 대하는 태도가 싹 달라졌습니다. 물론 한글 단체들의 20년의 꿈도 곧 실현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쉽고 실망스런 일이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3년 남짓 지난 1971년 6월, 한자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 새로이 국무총리와 문교장관직에 취임하면서 이 한글전용 5개년 계획은 발목이 잡히고, 더는 계획대로 추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강물은 때에 따라 다소 더디게 흐를지라도 결코 거꾸로 되돌릴 수는 없다’는, 지도교수 허웅 선생님의 예견대로, 오늘날 우리 사회는 한글전용이 거의 정착이 됐습니다.

  학생운동 초창기에 저희가 한 일을 몇 가지 더 나열하면, 택시 미터기에 딸린 일본식 한자 ‘공차(空車)’를 우리말 ‘빈차’로 바꾸게 했고, 한자 간판만 내걸고 있는 중국식당들에도 한글을 병용한 간판을 걸게끔 했습니다. 또 그 시절 은행에서 관행처럼 쓰던 한자 숫자를 한글로 바꾸게 한 일도 있습니다. 수표 같은 것에 유난히 더 어려운 한자로 숫자를 적었는데, 그것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한글로 바꿔 적게 한 것이지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말 이름 짓기 운동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잘 시작했다고 스스로 자부할 만큼 보람이 큰 사회 문화 운동이었습니다.

  저는 서울대에서 국어운동학생회를 창립한 뒤에, 맨날 강연회니 거리 계몽이니 그런 것만 해 가지고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는 뭐 특색 있는 사업 거리가 없을까 고심을 했는데, 문득 제가 아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 한 분의 어린 딸 생각이 났습니다. 민씨 성을 가진 그 아이의 이름은 비록 한자였지만 우리말 ‘달래’였습니다. ‘진달래’… 아니 그 아이 성이 민씨라서 ‘민 달래’였지요. 그래서 착안한 것이 1967년 봄에 처음 선을 보인 고운이름자랑하기 행사였습니다. 자주 독립 국가인 대한민국 사람이 왜 중국식 한자이름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하는 의문이 출발점이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도 호적에 이름을 올리려면 반드시 한자가 있어야만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첫 해 고운 이름을 공모하면서, 한자이름이라도 그 소리나 뜻이 우리말이면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름들을 접수하다 보니, 이미 호적에 한글로 올린 이름들이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사실 그 시절에도 출생신고서에는 반드시 한자로 이름을 적어야 한다는 규정 따위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출생신고서를 받는 전국의 담당 공무원 거의 대부분은 한글이름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 행사에서 자녀들이 금상을 받은 금수현 선생님 같은 분은 공무원과 싸우다시피 해서 둘째 아들인 ‘난새’부터 간신히 호적에 한글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어쨌거나 이 행사는 1967년부터 1986년까지 서울대 국어운동학생회의 연례행사로 열렸고, 그 뒤엔 한글학회가 1991년부터 2003년까지 '온겨레 한말글이름 큰잔치'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는데, 더는 이런 행사가 필요없겠다 싶어, 지금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저희 동아리가 이 운동을 시작해서 이 나라에 우리말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일부 선각자들이 지핀 불씨에 저희 학생들이 바람을 불어넣어 들불처럼 확산을 시킨 것만은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한때는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의 10%가 한말글이름을 가졌었는데, 근래에는 조금 줄어든 걸로 보입니다. 아직도 대도시보다는 지방과 시골에서, 남자아이보다는 여자아이에게 우리말이름을 훨씬 더 많이 지어 주고 있습니다. 재작년에 제가 대표로 있는 ‘한말글이름을사랑하는사람들’이 뽑은 ‘장한 한말글이름 청소년상’ 수상자는, 17세 이하 세계 청소년축구대회에서 우승을 했던 소녀 선수단 스물한 명 가운데 일곱 명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말이름이었고, 그 밖에도 비록 한자식 이름이었지만 호적에는 한글로 올린 이름이 한 명 더 있었는데, 다 포함하면, 놀랍게도 이 소녀 축구단은 전체 선수의 38%에 이르는 선수가 한글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현재 우리나라에는 한글이름을 가진 사람이 어느 정도 되는가? 제가 대략 추산하기로는, 2백만에서 3백만 명 사이의 국민이 주민등록부에 한글로 된 이름을 올려놓고 있으리라고 봅니다. 저 역시 그 가운데 한 명이고요.

  외솔 선생님을 마지막 뵈 온 때는, 대학 4학년 졸업을 몇 달 앞둔 11월쯤이었습니다. 태평로 길을 걸어가다가 서울신문사 건물 앞에서 선생님과 마주쳤습니다. 아마도 언론인회관에서 하는 무슨 행사에 참석하셨다가 먼저 나오신 듯 보였습니다. 제가 반갑게 인사를 드리자, 선생님은 아무 말씀이 없이 길에서 한참동안 저를 꼭 안아 주시고는, 다시 광화문 네거리 쪽으로 걸어가셨습니다. 그게 선생님을 뵌 마지막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졸업 직후 학군단 장교로 군에 복무하기 시작한 3월에 서거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직접 학교에서 모신 적은 없지만, 대학 4년 내내 저의 참 스승이셨고, 그 뒤부터도 지금까지 한시도 제 곁에서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이런 위대한 분한테서 제가 한동안 지도를 받고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저로서는 참으로 행운이었습니다. 그런 분을 기리는 외솔상을 오늘 제가 받는다는 건 분명히 한 개인으로서 영광이지만, 저는 학생 때 국어운동을 함께 했던 모든 동지를 대신해 제가 받는 것으로 여겨 더욱 기쁩니다.

  마지막으로 제게 오늘 과분한 상을 주신 외솔회에 저도 자그마한 기념품 하나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정말 값으로 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귀중한 휘호 한 점인데, 원본은 아닙니다. 외솔회 사무실에 걸어 놓았으면 합니다. ‘한글이 목숨, 최현배’… 1932년 경성의 한 음식점 방명록에 선생님이 쓰신 글씨입니다.

  고맙습니다.  

(2013. 10. 25. 이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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