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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2005년 11월 09일 18시 14분에 남긴 글입니다.
'훈민정음' 원본 발견 경위

<글쓴이: 한글학회장 김 계곤>

* 이 글은 보성 중‧고등학교 교지『보성』제3호(1964. 1. 15.)에 실렸던 것인데, 최근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ꡔ훈민정음ꡕ 원본 발견 경위에 대한 한 의견으로서 여기에 옮겨 싣습니다. 〈엮은이〉


1. 머리말

『훈민정음』원본 발견 경위에 대하여 적어 달라는 문예반 학생의 청탁을 받고, 여태껏 지면을 통하여 발표된 글을 종합해 보고 더 소상한 것을 알기 위하여 이미 발표한 이와 그때 일을 잘 알고 있을 듯한 이를 찾아가서 여러 가지로 물어 보기도 했다. 그렇다고 모든 의문이 다 풀린 것은 아니나 그 결과 지면으로 이미 발표된 글 내용과 다른 점도 있었으며, 또 여태 알려지지 않던 일들도 있어 조금의 보탬이 되리라고 여긴다.
이 글을 보는 대상이 주로 고등학교 학생이라 원본 고증에 대한 전문적인 것은 피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알기 쉽게 말하겠다.
글쓴이가 교단에서 훈민정음을 다룰 때마다 원본 자체의 값어치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이 귀중한 책을 발견하여 고이 보관해 온 간송 전 형필 선생의 정성을 누구나 알아야 되겠다는 일념에서 원본 발견 경위에 대하여 듣고 본 대로의 이야기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므로 글쓴이에게 배움을 받은 지나간 10여 년 동안의 학생들은 한 번씩 이 이야기를 듣고 졸업한 셈인데, 이제 생각하니 고쳐야 할 사실도 있어 더 자세히 살펴서 그 잘못된 점을 명백히 하는 데에도 뜻이 있다고 하겠다.


2.『훈민정음』원본에 대한 여러 사람의 말들


(1) 지면을 통하여 이미 발표된 것

① 정 철: 「훈민정음의 보존 경위에 대하여」, 국어국문학 제9호, 15쪽.

원본 발견 경위에 대하여 맨 처음으로 지면을 통하여 발표한 이는 일사 방 종현 선생인 듯하나 그 글을 얻어 볼 수 없고, 그 다음이 정 인승 선생께서 ꡔ한글ꡕ을 통한 발표가 있은 듯하나 광복 전 글이라 쉽게 얻어 볼 수 없어, 비교적 새로운 발표의 하나인 정 철 님의 것을 간단히 추려서 말해 두겠다.

1940년(광복되기 5년 전) 경북 안동군 와룡면 주하동에 살고 있던 이름난 선비 이 한걸 님의 셋째아들 이 용준이란 이가 그 당시 서울 경학원(성균관대학교의 전신)에 재학하고 있었다. 이 용준은 성대(서울대학교 전신) 재직 중이던 김 태준 교수가 가장 사랑하던 제자였다고 한다. 하루는 이 용준이가 김 태준 교수에게 자기 본가에 ꡔ훈민정음ꡕ이란 책이 있다고 이야기하자, 김 교수는 다시 전 형필 선생에게 소개하였다. 전 형필 선생은 그때 가산이 넉넉하여 귀중한 책이면 값의 고하를 묻지 않고 사들이려고 하였으므로, 김 교수가 많은 돈을 얻어 가지고 당장에 안동으로 내려가서, 표지와 첫머리 두 장을 뜯어 버리고 돌돌 말아서 서급(책상자)에 비장해 둔 이른바 원본 ꡔ훈민정음ꡕ을 보았다. 앞머리 두 장이 찢어진 이유는 이 한걸 님의 선조께서 여진 정벌의 공이 있어 세종대왕으로부터 상으로 받아 궤 속에 감추어 대대로 전해 온 가보로 남겨 왔기 때문에 연산군 때 한글 폭정으로 그 책의 보존을 위하여 부득이 찢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 후 찢어진 두 장은 한지를 소죽솥에 삶아 누른 빛을 내어서 원본의 서체(곧 안평대군체)와 비슷하게 이 용준이가 베껴 썼다고 한다. 이와 같이 깁느라고 그 곳에서 오래 묵은 김 교수는 사학계의 연구 자료로 이 책을 서울로 가져가기로 허락을 청하고 그때 돈 3,000원을 사례하고 상경 후 전 형필 선생에게 전하였다. 그 후에 소문이 퍼져 당시의 조선어학회 회원을 비롯하여 이 책에 관심을 가진 이는 그 원본을 보고 싶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자 전 형필 선생이 무척 사랑하고 귀중히 여긴 이 책의 내용을 공개하였는데, 첫머리 기운 곳에 ‘耳’ 자를 써야 할 것을 ‘矣’ 자로 잘못 쓴 것이 있어 이것을 최 현배 선생께서 판별하셨다고 하였다. 그리고 최 현배 선생 지은 옛판 ꡔ한글갈ꡕ에 ꡔ훈민정음ꡕ 원본이 경북 의성의 어느 고가에서 나왔다고 적힌 것은 원 책 주인 이 한걸 님이 적지 않은 사례금을 받고 세전 가보를 남의 손에 넘겼다는 것이 불명예스러워 김 교수에게 고의로 부탁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다음은 원본 발견 경위에 대한 것이 아니고 본문 내용과 자형 등을 들어서 전 형필 선생 소장의 ꡔ훈민정음ꡕ이 원본이냐 아니냐에 대한 고증을 낸 것인데, 그 장황한 내용은 생략하고 각자의 결론적인 의견과 소감 등을 참고삼아 간단히 들어 두기로 하겠다.


② 최 현배:『고친 한글갈』, 29~37쪽.

여섯 가지 이종본―1. 실록본(ꡔ세종실록ꡕ에 순 한문체로 실린 본문과 정 인지 서문), 2. 일본 궁내성본(宮內省本), 3. 가네자와본(金澤庄三郞 박사 간수, 行智阿闍梨 자필의 사본 내용은 다음 박님본과 같다.), 4. 희방사본(월인석보 첫째 권의 책머리의 부록 「세종어제 훈민정음」 내용이 정밀하지 못하다.), 5. 박님본(박 승빈 님이 간수한 단행 판각본), 6. 전님본(전 형필 님의 간수로 된 해례본)―을 들고, 먼저 원본이 될 수 있는 조건인 ‘○세종대왕이 맨 처음에 한글을 만들어 내었을 적에 된 책, ○반포용에 쓴 책’의 두 가지 중에 후자를 택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섯 가지 이종본 중에서 최근 경북 안동군 이씨 집에서 발견되어 서울 전 형필 님의 간수로 된 ꡔ훈민정음ꡕ 곧 ‘전님본’이 진정한 반포용인 원본이라고 하고, 원본될 여덟 가지 근거를 아주 정연하게 밝혔으며, 다음과 같은 감탄을 표하였다.

훈민정음 반포 후로 500년 동안의 실록에 훈민정음 간행에 관한 기록이 없고, 최 세진, 신 경준, 유 희 같은 한글 학자들도 그 원본을 보았다는 기록도 도무지 없다. 그래서 박님본을 원본이라고 인정하려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깊이 한글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는 박님본을 진정한 원본될 수 없음을 생각하게 되어 진정한 원본의 나타나기를 고대함이 간절하더니, 천만뜻밖에 영남 안동에서 이런 진본 곧 전님본이 발견되었음은 참으로 하늘이 이 글의 운을 돌보자고 복 주신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 반갑도다 훈민정음 원본의 나타남이여! …… 여태껏 도무지 형체도 없고 말도 없던 훈민정음의 원본이 그 정연한 체제로써 나타났음은 한국 최대의 진서임은 물론이요 또 그 해례로 말미암아 종래 정음학의 여러 가지 의혹의 구름안개를 헤치어 줌은 우리 심정의 둘도 없는 시원스러운 일이요, 과학 정신의 최대의 만족이다.


③ 홍 기문: ꡔ정음 발달사ꡕ(상권).

‘1. 예의, 2. 해례, 3. 언해’로 갈라 두고, ‘2. 해례’ 곧 전님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종이나 판각이나 서지학상 문외한의 눈에도 일견 그 당시의 고간본임을 추측하게 한다. 또 설사 서지학의 구구한 증명을 받지 않더라도 그 내용이 각 문헌으로부터 고증한 바와 전연 일치하고 또 그 내용이 그 이후 누구도 안조(‘위조’와 같은 말)하였을 수 없는 것이다. 불행히 그 원본은 제1과 제2의 두 장이 결락되어 붓으로 보사하였으나 다행히 예의의 서론장과 문자장의 반설음까지이므로 큰 지장이 된 것은 없다. 그 보사에는 “便於日用耳”의 ‘耳’ 자를 ‘矣’ 자로 쓰고 반설음의 구두점을 ‘半舌’ 아래 찍었는데 그것은 물론 보사의 와오(訛誤)다.


④ 김 민수: ꡔ주해 훈민정음ꡕ.

훈민정음을 책 이름으로서 일컫는 것과 글자 이름으로서 일컫는 것의 두 가지가 있다고 전제하고, 이른바 책 이름으로서의 ꡔ훈민정음ꡕ을 내용상으로 보면 다음과 같이 나누어진다고 하였다.

해례본― 한문본―        ① 전씨본
         ┌① 해례본 권두의 것
         ┌ 한문본-│
         │ └② 실록본
예의본―│         ┌ ① 월인석보본(희방사판)
         └ 국역본-         │ ② 박씨본(목판본)
         (訓譯本)         │ ③ 가네자와본(사본)
        (諺解本)         └ ④ 일본 궁내성본(사본)


그리고 전씨본이 초간본인지의 여부는 모르겠으나 세종 16년에 주조된 갑인 활자가 아니기 더욱 의심이 없지 않으나 적어도 초간본의 원형을 그대로 갖춘 것이라고 인정된다고 하였으며, 전씨본이 유일본일 뿐만 아니라, 여간 진귀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 밖에 책의 체제, 규격 등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해 두었다. 그리고 그 책 끝에 원본 사진판을 실어 두었다.


⑤ 김 윤경: 「훈민정음에 대한 몇 가지 고찰」, 일석 이 희승 선생 송수 기념 논총, 192쪽.

ꡔ훈민정음ꡕ 원본(해례가 붙은)이 자취를 감추게 된 지는 상당히 오랜 것 같다. 신 경준이나 유 희 같은 저명한 학자들도 이를 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런데 왜정 말기에 이르러서(1940년) 7월에 경상북도 안동 이 한걸 댁에서 대대로 전하여 오던 이 국보 ꡔ훈민정음ꡕ(해례가 붙은) 원본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국어학계의 한 큰 경사였다. 국어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은 물론이요, 세계 문화에 이바지함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왜정이 국어 말살 정책을 쓰던 때라 ‘꿀먹은 벙어리’와 같이 기쁘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ꡔ세종실록ꡕ이나 ꡔ월인천강지곡ꡕ에 실린, 해례가 없는 본문, 혹은 그것의 번역본이 전하였을 뿐이었다. 또는 그것을 단행본으로 박아 낸 듯이 보이는 박 승빈 장본과 일본 궁내성 장본과 초본인 어 윤적 장본이 전하였을 뿐이다.


⑥ 유 열: ꡔ풀이한 훈민정음ꡕ.

희방사의 목판본 ꡔ월인석보ꡕ의 책 머리에 붙어 있는 열다섯 장의 ꡔ훈민정음ꡕ 본문의 풀이와, ꡔ세종실록ꡕ에 순 한문으로 본문만 실린 것과, 박 승빈 님이 간수한 단행본으로 된 ꡔ훈민정음ꡕ 본문을 한글로 주해한 목각본과, 일본 궁내성의 사본 들이 있기는 했으나, 모두가 서로 조금씩 다를 뿐만 아니라, 하나도 원본 원전으로는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던 즈음 지난 1940년 여름에 뜻밖에도 경북 의성군 어떤 옛집에서 수지와 같은 헌 책 속에 섞이어 ꡔ훈민정음ꡕ 한 권이 나왔으니, 이야말로 기적적이었으며 그 내용과 겉모양에 있어서도 지금까지의 여러 책들과 아주 다른 바 있어 틀림없는 오백 년 전의 원문 원전임이 분명하여 송 석하 님이 처음 학계에 알리게 되자 누구나 다투어 보기를 바랐으나 전 형필 님이 깊이 간수한 바 되어 아무도 볼 길이 없었고, 다만 방 종현, 홍 기문 두 분이 가진 모사본이 있고 또 이어 방 종현 님의 신문지상을 통한 자세한 소개와 이어서 잡지 ꡔ정음(正音)ꡕ이 프린트로나마 전문을 소개한 특집호를 내고 다시 정 인승 님이 ꡔ한글ꡕ에 「고본 훈민정음의 연구」를 발표하고, 또 그 두 해 뒤인 1942년에는 최 현배 님이 그의 갸륵한 지음인 ꡔ한글갈ꡕ(책의 원고 정리가 다 된 것은 1940년이었으나 출판 사정이 허락되지 않아 2년 늦어졌다.) 첫머리에 원본의 전문을 소개하여 그 책의 겉모습은 볼 길 없으나마 내용만은 넉넉히 알 수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말썽 많던 여러 가지 커다란 문제들 곧 한글의 기원설, 글자의 꼴, 글자들의 바른 소릿값, 반포한 날 등이 쉽게 밝혀졌다. 그리고 조선어학회에서는 전 형필 님의 기특한 호의를 입어 그가 귀히 귀히 간수하였던 원본을 빌려 그 책과 모습이 꼭 같은 영인본을 내게 됨은 오백 주년(1946. 10. 9.) 기념이란 뜻을 떠나서도 여간 큰 역사적 사업이 아닐 수 없다.


(2) 글쓴이가 직접 대면 혹은 전화로 전해 들은 것

① 유 열

광복 후 1948년께(?) 부산 사범학교에서 경남 중등학교 국어과 교사들의 강습회가 있었는데, 그때 유 열이 강사로서 ‘훈민정음 풀이’를 맡은 일이 있었다. 그때 글쓴이가 청강할 때 들은 이야기를 다소 어렴풋한 점도 있으나 기억을 더듬어서 적어 보기로 하겠다.
이 한걸 님의 셋째아들 이 용준의 소개로 김 태준 교수가 전 형필 님에게 알려 세 사람이 그 길로 바로 경북 안동 이 한걸 님 댁으로 내려가 이른바 원본을 보니, 책장을 모두 뒤집어서(뒤집어 둔 쪽에는 낙서가 돼 있었다.) 돌돌 말아 둔 것을 한 장 한 장 펴서 차례를 맞추어 보았더니 표지와 첫머리 두 장이 찢어져 없어졌다. 책값은 묻지도 않고 전 형필 님이 그때 돈 2천 원(백석 살림의 5분의 1에 해당된다고 하였다.)을 주었는데 책 주인이 놀라 너무 많은 돈을 받아 되겠느냐고 하면서, 선비 가정에서 책을 팔았다고 해서는 체면이 안 서니 제발 제 집에서 샀다는 말만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 이후 전 형필 님은 왜인들의 강탈이 겁이 나서 비밀리에 두었다가 훈민정음에 대한 학계의 구구한 이설과 한글 학자들의 보고 싶어하는 심정을 덜어 주기 위하여 그 내용을 ꡔ정음ꡕ에 게재해서 발표하였고, 광복이 되자 조선어학회에 무료로 원본을 제공하여 오백 책 한정으로 영인본이 간행되어 이제 세상 사람이 널리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원본이 발견되기 전에 구구한 학자들의 이설이 많았는데, 이 원본으로 말미암아 그 시비가 가려졌다. 여기에 한 가지 놀라운 일은, 원본을 보기 전에 발표된 내용이 그 중에도 정곡을 맞힌 이가 바로 최 현배 선생이라고 하였다.


② 이 가원
[*( ) 안의 표기는 직접 대면한 날 혹은 전해 들은 날짜를 보임.]
[*이 가원 선생은 현재 연세대학교 교수이며 고향이 경북 안동이요, 퇴계 선생의 후손이다.]

왜정 때 김 태준 교수로부터 ꡔ훈민정음ꡕ 원본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은 바 있다고 하였다. 여태 알려진 사실과 다른 점은 ꡔ훈민정음ꡕ 원본의 원 주인은 이 한걸 님 댁의 것이 아니고, 이 용준(일명 기범)의 처가에서 보존된 것이라고 하였다(1963. 11. 16.).


③ 정 철

글쓴이가 서신으로 물은 데 대하여 서신으로 회답된 내용의 일부――원본이 경북 안동군 와룡면에서 발견된 것은 사실이나 이 한걸 님 댁 가보라 하는 점은 의심이 있으므로 결국 글씨 쓴(이 용준) 사람의 처가의 소유물인 듯 짐작할 뿐이다(1963. 11. 20.).
그 다음 다시 전화로 물었더니 대답이, 이 용준의 형이 현재 인천교육대학에 재직 중인데 그 분을 만나 직접 들은 이야기라면서 자기 가문의 자랑으로 자기 본가 보존이라고 했지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고 자기 아우(이 용준)의 처가 소유라고 하더라는 것이다(1963. 11. 27.).


④ 전 제옥

처음에는 간송 전 형필 선생의 미망인 김 여사에게 ꡔ훈민정음ꡕ 원본 발견 경위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실이 없을까 하고 중간에 사람을 시켜 물었는데, 전 형필 선생 생존 때 항상 함께 지내던 전 제옥 선생에게 물어 보면 좋겠다고 하기에 전화로 전 제옥 선생에게 물었더니 그 대답이, 소상한 내용은 모르나 경북 안동 어느 고가에서 사들였다는 사실과 사들일 때 전 형필 선생이 직접 안동으로 내려가신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때 돈으로 서울 집 한 채 값이라고 하는 오천 원인지, 삼천 원인지를 책값으로 주었다는 이야기를 전 선생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광복 후에 어느 신문사에 그 원본을 보이려고 가지고 갈 때에도 전 선생과 같이 간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1963. 11. 25.).


⑤ 최 현배

1940년 여름에 ꡔ훈민정음ꡕ 원본을 가졌다는 말을 듣고 보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에 ꡔ정음ꡕ에 전문이 실렸다. 그때 주로 교섭이 있고 내용을 잘 알기는 홍 기문인 듯하다. 광복 후 전 형필 님이 한글 학자들을 초청하여 원본을 보인 바 있다(1963. 11. 27.).



3. 종합된 견해

이상으로써 글쓴이가 알아 볼 수 있는 한계에서 대략 살펴본 셈이다. 앞 항들의 내용을 종합해 본다.

(1) 간송 전 형필 선생 소장 ꡔ훈민정음ꡕ이 원본으로서 근거가 뚜렷한 것.
(2) 그 원본의 표지와 첫머리 두 장의 낙장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것을 기워 넣을 때 두 군데의 잘못이 있었다는 것.
(3) 하마터면 원본을 영영 볼 수 없을 형편에 그 원본이 발견된 기쁨은 한량이 없고 원본이 지닌 가치는 귀하고 중하며 학술 면에서 보더라도 학계에 던진 공헌이 지대한 것.
(4) 원본 발견 경위가 이 용준의 소개로 김 태준 교수가 알고 김 태준 교수의 소개로 간송 전 형필 선생이 알아 사들인 것은 틀림없으나 전 형필 선생이 직접 안동으로 내려갔느냐, 아니면 김 태준 교수의 손에서 받아든 것이냐가 문제인데, 이것은 직접 내려갔다는 설을 믿는 게 좋겠다. 전 형필 선생이 생존시에 한 여러 가지 일들을 들은 바에 의하면, 우리 나라의 문화재인 골동품 혹은 고서 등을 수집할 때 매일처럼 손질을 하고 기쁨에 겨워 밤을 꼬박 새운 일도 있다고 했다. 그러한 취향에 ꡔ훈민정음ꡕ 원본 보존의 소개를 받고 앉아 있었을 리가 없으며, 책값을 책 주인이 바라던 의외의 거액을 치른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넉넉히 알 수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5) 원본이 전 형필 선생의 소장이 되자 그 소식을 일반 학계에서 안 것은 송 석하 님의 소개로 전해진 듯하다.
(6) 책의 원 주인이 이 한걸 님이냐, 아니면 그의 아들 이 용준의 처가이냐가 문제인데, 이것은 이 용준의 처가로 본다. 그 이유는 이 가원 선생과 정 철 님의 말이 내용이 서로 부합되는 점과 이 용준의 형의 말이 가장 정확한 것이겠는데 앞에 든 바대로이니, 여태까지 이 한걸 님의 것으로 알아 오던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고 이 용준의 처가의 것이었음이 여태 알려지지 않던 새로운 사실로 드러난 것이라고 하겠다.
(7) 책값이 이천 원, 삼천 원, 오천 원의 세 가지 설이 있는데, 꼭 어느 쪽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으나 그 당시의 돈으로는 분명 거액의 돈임이 틀림없다.


4. 맺음말

앞 2, 3장에서 공식적인 것은 다 언급되었다고 여긴다. 끝으로 글쓴이가 하고 싶은 말을 간단히 적어 보려 한다.
한글 학자나 뜻있는 이는 모두 이 ꡔ훈민정음ꡕ 원본의 발견에 대하여 감탄과 경이를 늘어놓지 않은 이가 없었으나, 이 원본을 발견하여 보존 간수한 이의 공로에 대해서는 크게 들어 치하한 이가 없었다. 학자가 학문을 위하여 차곡차곡 닦고 발표하여 세상에 알려지지 않던 새로운 학리를 천명하는 것도 공이지마는, 간송 전 형필 선생과 같이 왜정 말기에 총칼의 서슬이 대단하던 그때 인멸되어 가는 우리 나라의 문화재를 가산을 아끼지 않고 사들여 고이 보관해 온 정성과 공은 그 얼마나 큰 것이냐!
누구는 말하기를 가산이 넉넉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지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치부한 이가 먹고 쓰는 한평생을 향락 속에 지내면서도 나라 위한 한 가닥 정성은 고사하고 오히려 유해한 짓만 하다가 죽어간 이가 얼마나 많으며 돈을 보람있게 쓸 줄 아는 이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 간송 전 형필 선생은 문화재는 물론 육영 사업에까지 정성을 다하여 이제 대 보성의 기반을 완전히 닦아 두셨으니, 그 공은 필설로써 다 못 할 것이다.
현재 신문 지상에 보면 우리 나라의 문화재가 외국으로 많이 팔려 간다고 한다. 저승에 계신 간송 전 형필 선생은 그들의 소행을 어떻게 보고 계실지? 듣기에 전 형필 선생이 생존시에 애써 수집하신 우리 나라 문화재 중 국보적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한다. 알려지지 않은 이 국보적인 문화재를 어떻게 보존해서 그 빛을 낼 것인지? 글쓴이의 생각으로는 한 개인보다도 전 국가적인 대책이 있어야 될 것으로 믿어진다. 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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