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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2004년 01월 29일 19시 15분에 남긴 글입니다.
자주적이고 실용적으로 우리 말글을 보는 눈

자주적이고 실용적으로 우리 말글을 보는 눈

김 용묵 (http://moogi.new21.org)

0. 서론

한글이 어떤 문자인지를 깨닫고 감격스러워하던 때가 엊그제 같다. 우리 말글을 목숨을 걸고 지킨 선조들의 은혜에 고마움을 느꼈다. 밥을 줘도 못 먹는 못난 후손이 되고 싶지 않아 나는 자판도 세벌식으로 바꾸고, 한글에 대해 알리는 인터넷 사이트들을 탐독하고 그 방면에서 활동하는 여러 선후배와 인연을 맺어 같이 활동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한글이 그리는 이상과는 너무나 다른 현실을 보며 개탄했고, 왜 말글 관련 싸움이 21세기에 이르도록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나 이유를 오래 전부터 알고 싶었다. 나름대로 진단을 내린 뒤 나는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한말글 운동이 왜 지금 같은 상황에 다다랐는가? 내부적으로는 우리말 표기법을 연구하는 사람, 토박이말 운동을 하는 사람, 문법과 표준어를 연구하는 사람, 우리말의 발음을 연구하는 사람, 외래어의 한글 표기법을 연구하는 사람, 더 나아가 한글 기계화나 한글 디자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서로 자기 주장만 내세우며 힘을 모으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한다.

우리말이나 한글에서 한두 분야의 전문가는 많지만 이 모든 분야에 정통한, 내공 깊고 잔뼈 굵은 한말글 운동꾼은 너무나 희귀하며, 겨우 그런 사람을 찾으면 이미 은퇴(?)했거나, 개인 사정 때문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단결력뿐만 아니라 한말글 진영의 주장과 논리의 질까지 전반적으로 떨어뜨리게 됐다.

그래서 토박이말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대체로 경제성 쪽으로 나은 대안을 제시하는 데 실패하고, 외래어 표기법 진영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주장을 함에도 불구하고 기초적인 음운학과 문법 지식의 결여로 사람들로부터 필요 이상의 비판을 받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어느 분야든 한말글 운동들이 좋은 취지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개 이런 식이었고, 노력에 비해 좋은 열매를 거두지 못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외적인 이유로는, 한말글 진영이 반대파들과 효율적으로 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론 반, 궤변 반으로 무장한 반대자들에게 “한글만 써도 아무 문제 없으니까”, “우리 문자니까”, “시대 대세니까” 등의 약한 논리로는 반박을 하지 못한다. 물론 이들이 반박만 제대로 한다고 물러날 존재도 아니긴 하지만…….

논쟁에서 남을 이기는 유리한 위치에 서는 좋은 방법은, 논쟁 대상인 개념을 자신에게 유리한 범위까지로 정의하고, 불리한 조건은 감추거나 일단 그렇지 않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한글/한자 문제로 토론하는 사람이라면,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이들도 ‘한글 전용’이 규정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한글과 한자와 한자어, 그리고 한자 교육의 경계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자파들의 궤변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

이 글이 우리 말글이 당면한 여러 문제와 과제에 대해 당장 가야 할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현재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하여 가능성이 없는 길을 가지치기하고, 우리가 가야 할 바른 길의 조건을 제시하는 데는 손색이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1. 청각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문자 언어는 무용지물임을 알아야 한다

한글 전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대전제는 단 하나다. 우리말에 한자어가 이렇게 많으니, 한자어는 한자로 밝혀 적어야 눈에도 빨리 들어오고 우리말의 어원에 대해 아는데 좋다는 것이다. 한자도 우리 문자이고, 컴퓨터로 입력하는데 어렵지 않고, 한자를 배우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들은 부수적인 논리이다. 나는 이런 사람을 시각성에 눈이 먼 사람이라 부른다.

한글은 일단 소리글자이기 때문에, 한글 전용에서 드러나는 문제는 대개 우리말 자체의 문제이다. 한글은 우리말의 위기를 솔직하게 폭로하지만, 한자는 그 문제를 슬쩍 덮어 놓기만 할 뿐, 이것을 악화시키기만 한다. 한자의 장점에 도취하기 전에, 한자란 문자가 소리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혹은 우리말에서 쓰이면서 최소한 얼마나 엉터리로 변했는지 심각하게 따져 봐야 한다.

물론 우리말 중에도 ‘낮다’와 ‘낫다’는 종종 청각적으로 혼동을 일으키기도 하며, ‘쓰다’는 한 문맥에서 다르게 쓰일 수 있는 뜻을 여러 개 포함하고 있어서 한자어의 도움을 받아 뜻을 변별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세상에 ‘주다’와 ‘받다’, ‘사다’와 ‘팔다’를 같은 소리로 표현하는 말이 어디 있는가? ‘연패’는 이겼다는 뜻인가, 졌다는 뜻인가? ‘명왕성’의 ‘명’이 어둡다는 뜻의 한자란 걸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접두사 ‘전’은 ‘앞’이란 뜻인지 ‘전체’라는 뜻인지, ‘반’은 ‘절반’이라는 뜻인지 ‘반대’라는 뜻인지, ‘이’는 ‘둘’이라는 뜻인지 ‘격리된’이란 뜻인지 분간이 어려워 쓰임이 모호하다. 이 문제의 본질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한자어가 왜 흔히들 어렵다고 하는지 답이 보일 것이다. 별것 아니다. 첫째는 대개가 청각적인 변별력이 뒤떨어져 언뜻 들어서는 뜻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는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이 이런 불편한 말을 고상한 말이랍시고 즐겨 썼기 때문이다. 정말 담고 있는 내용이 어려운 한자어는 의외로 적으며, 반면 토박이말에도 함축적이고 내용이 어려운 말이 있고, 그런 것을 만들 수도 있다. 단지 우리가 이를 활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대체 우리말이 어휘가 얼마나 빈약하면 저런 조잡한 음운 체계를 빌려서 새 말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런 소리를 가진 문자가 정녕 우리말에 맞게 만들어진 우리의 문자가 맞는지 한자 옹호론자에게 묻고 싶다. 이런 절름발이 문자 언어가 과연 그렇게도 중요한 전통이고 모든 초등학생에게 그렇게도 힘들여 가르쳐야 할 가치가 있는가?

한자어가 아무리 함축성, 시각성, 조어성이 좋다고 해도 언제까지나 청각적 변별력이 있는 한도 내에서이며, 청각성이 갖춰지고 나면 한자는 필요 없이 한글로 한자어만 받아 적어도 아무 문제없다. 예를 들어 ‘촬영’처럼 청각적으로 잘 변별되는 한자어를 굳이 복잡하게 한자로 쓸 사람은 없을 것이고, 반대로 한 소리 여러 뜻이 존재하는 한자는 소리 충돌 때문에 적극적으로 그 한자로 말을 만들려고 해도 한계에 부딪히고 말기 때문이다.

물론, 한자어든 토박이말이든 이미 쓰이고 있는 우리말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감정’이란 단어가 ‘느낌’이란 뜻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원망하는 마음’이란 뜻이 어떤 근거로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또한, ‘핵융합’의 ‘융’과 ‘금융’, ‘융통’ 같은 단어의 ‘융’이 같은 형태소임을 아는 것은 국어를 잘 아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형태소를 꼭 한자로 쓸 줄 알아야 하고 한자로 적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원칙 없이 남용된 한자어들 때문에 우리말의 소리와 어휘 구조가 꼬이고, 한자어의 사잇소리 문제가 골치 아픈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은 한자와의 의존도를 줄이는 방향으로 해결해야 한다. ‘고사’, ‘사기’처럼 특히 동음한자어가 많은 어휘는, 우리말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으로 뜻을 한정하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같은 죽은 말도 한자로 뜻을 밝혀 적기에 앞서, 우리말다운 표현으로 바꿔야 한다.

그 이유는 쉬운말, 순우리말을 살리기 위해서보다 훨씬 절박하며 근본적이다. 당장 알아듣지를 못하는 말이기 때문이지 않는가.

2. 우리말의 무역 수지 적자를 극복해야 한다

그런데, 청각성만 내세울 경우, 우리말이든 한자어든 외래어든 소리 충돌만 피하게 말을 받아들여 쓰면 되지 않겠냐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나라 국민, 특히 자라나는 어린 학생들의 평균적인 영어 실력은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이들이 영어라는 도구로 자신의 능력을 국제 사회에서 마음껏 펼칠 수 있다면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기고 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우리 말글과 미국 말글의 경계와 주객 의식이 모호해지고, 따라서 우리말과 관련된 목표 자체가 송두리째 흐물흐물해지고 있다. “알파벳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이 정도는 누구나 아는 영어 단어인데 좀 섞어 써도 문제될 게 있겠어?” 이것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사항이다. 이걸 가지고 한자파들은 엉뚱하게도 한자는 안 되고 영어는 괜찮냐고 시비를 걸기도 한다.

외래어라고 다 같은 외래어는 아니다. 애초부터 우리 문화가 필요로 하지 않은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빌려 온 외래어(예를 들어 우리는 젓가락을 썼지 포크를 쓰지 않았다), 더구나 청각적으로 별다른 문제가 없는 외래어는, 순화해서 쓸 수 있다면 주체적이고 좋지만 그것이 필수는 아니다. 하지만 ‘오케이’, ‘파이팅’처럼 지극히 보편적인 개념과 감정까지 무분별하게 외래어를 통해 표현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언젠가 중국 영화에서 중국인 배우가 ‘오케이’란 말을 쓰는 것을 듣고 무척 어색한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멋있고 유식하게 보이려고 외래어를 쓰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은 정작 그것을 어떻게 여기겠는가?

우리가 수출하는 각종 전자/기계제품에서, 로열티 없이 순수 국내 기술로 제작되는 부분이 얼마 없음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 우리말을 마땅히 받아 적을 문자가 없어서 한글이 창제된 것에는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

그런데, 어떤 개념을 우리 한국인이 보고 느낀 대로 만든 말로 표현하는 대신 외국어의 소리 찌꺼기를 수입만 해서 표현하고, 그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져 가는 것에 위기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대단히 적다. 언어의 보수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나는 현재 그 보수성이 잘못된 방향으로 잡혀 있으며(외래어를 선호하고 순우리말은 대개 저속한 말로 인식되어 있는 것), “사상 표현의 국산화율”은 휴대전화 부품의 국산화율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어떤 방법으로 순화하는 게 좋을까? 우리말 관점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영어 알파벳 약어나 그것을 그대로 읽은 단어가 좋은 대상이 될 수 있다. “에이치 티 엠 엘”이라는 단어를 인터넷의 의미를 살린 “그물씨글” 또는 하이퍼텍스트라는 의미를 살린 “뜀글새김말”로 순화하면 단어의 직관적인 의미가 보이기 때문에 영어 약어에서 괜히 느껴지던 거리감과 거품이 사라지고 이 개념이 완전히 우리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물론 이것을 어떻게 좀더 적은 타수로 입력하고 로마자만치 줄여서 표현할지는 우리말이 아닌 ‘한글의 기능성’에 대해 다룰 때 논해야 할 것이다.

나 역시 ‘셈틀’, ‘누리그물’ 같은 말이 다 잘 만들어진 토박이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모든 정보의 원천이고 그렇게도 신조어를 많이 만들어내는 영어에도 전혀 터무니없이 만들어지거나 황당한 계기로 의미가 확장된 말이 아주 많다. ‘거품’을 빼고 영어를 보면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단지 우리만 영어의 조어법대로 생긴 말과 우리말의 조어법대로 생긴 말을 서로 다른 잣대로 평가하고 있을 뿐이다.

‘글터’는 다의어인 ‘게시판’에서 분화하여 새로운 뜻을 잘 표현해 내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영어로는 다의어 한 단어인 것이 우리말로는 뜻이 구별되는 것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밖에, 어떤 토박이말에 있던 본디 뜻의 수요가 없어지면서 그 뜻을 비슷한 다른 뜻으로 확장해서 외래어를 순화하는 것도 거부감이 적은 방법이다. ‘갈무리’, ‘동아리’ 등이 이렇게 해서 잘 정착한 토박이말의 예이다.

이미 있는 말을 뭉치기만 해서 복합어를 만들거나 다의어 활용만 하는 것은(‘로그인’, ‘로그아웃’을 단순히 ‘들어가기’, ‘나가기’로 순화하는 것 등) 거부감을 불러오거나 경제성이나 변별력 면에서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이럴 때는 청각적으로 변별력이 있고 음절수에서 경제적인 외래어는 도리어 우리말 형태소로 삼는 지혜도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미 복합어가 돼 버린 ‘머리카락’보다 ‘헤어’가 경제적이고 다른 말과 결합하기 더 쉽기 때문에 ‘헤어’가 널리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손전화’와는 별개로 ‘폰’은 이미 ‘폰카’, ‘폰팅’ 등 이미 우리말 형태소로 쓰이고 있고, ‘컴퓨터’의 ‘컴’도 사실상 접두어로 쓰이고 있다. 한 글자만으로 뜻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한다.

3. 우리말의 특성을 이해하고, 우리말의 성능을 올려야 한다

지금까지 한자와 한자어, 외래어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아무런 통제도 안 하고 있으면 영어와 한자어가 우리말을 풍요롭게 해 주며 수평적으로 공존할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도 알아보았다. 외국 말글에 대해 완전히 개념을 잡았으면 이제 우리말 자체를 갈고 다듬는 데도 신경을 써야 할 차례이다.

무엇이 우리말 사랑이며 한글 사랑인가? 물론 맞춤법, 표준어에 관심을 갖고 이것을 꼭 지켜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도 남다른 말글 사랑이다. 그러나, 지금의 말글 규범이 우리말의 성능을 심각하게 저하시키고 있거나 그런 요소를 간과하고 있어서, 그것보다 더 나은 대안을 내놓은 것도 한차원 높은 말글 사랑이다.

이제는 한글의 기계화뿐만 아니라 우리말의 기계화까지 생각해야 할 때이다. 우리말이 외국인들에게 아주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은 심지어 한국인들조차 많이 공감한다. 그런데, 그것이 그 언어가 생겨난 문화적 배경이 고차원적이거나(높임법처럼) 표현과 어휘가 워낙 많아서 어려운 게 아니라, 불규칙이 난무하여 원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문법, 또는 동음이의어 구분하는 것 때문에 어려운 것이라면 그 언어는 경쟁력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말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여러 맛깔스러운 말들을 용도에 맞게 구분해서 쓸 수 있는 어휘력이 필수다. reliable을 대다수 영한사전이 풀이하는 것처럼 ‘믿을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이라고 번역하는 대신, ‘미더운’을 쓸 줄 아는 사람이 번역을 잘 하는 사람이다.

이 외에도 ‘않는다’와 ‘않다’, ‘다르다’와 ‘틀리다’, ‘첫째’와 ‘첫 번째’, ‘맞추다’와 ‘맞히다’ 등을 잘 구분해서 쓰는 것은 우리말의 논리력과 문법적 변별력을 높여 준다. 우리말의 쓰임에 원칙이 생기기 때문에, 맞춤법 검사기나 기계 번역기를 만들 때 예외를 고려할 필요가 없어지고, 우리말 정보 처리가 수월해진다.

이런 식으로 우리말을 철저하게 실용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우리말의 비합리적인 면이 눈에 보이고, 그 배경 역시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일요일날에 간다’ 같은 표현이 잘못됐는데도 어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쓰는 이유를 단순히 ‘믹서기’처럼 한자어와 토박이말이 어울리지 못해서라고 풀이할 수도 있지만, ‘집에 간다’처럼 우리말이 시간과 장소를 똑같이 ‘에’로 표현하고 있어서 ‘일요일’이 시간임을 강조하기 위해 ‘날’이 덧붙는다고 풀이할 수도 있다.

비슷한 예로, ‘바랐다’, ‘바랐는데’의 형태로 활용돼야 맞는 ‘바라다’가 자꾸 ‘바랬다’, ‘바랬는데’로 바뀌는 이유도, 단순한 ‘바람’과의 변별뿐만 아니라, 발음이 비슷한 ‘발하다’라는 용언에 적용되는 ‘여’ 불규칙의 영향 때문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발하다’는 ‘발했다’, ‘발했는데’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우리말의 높임법은 어떤가? 높임법 자체는 장점(예를 들어 높임 어미는 문맥에서 서술 대상이나 주어가 무엇인지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도 있고 단점도 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심각한 문제가, 보편적으로 쓸 수 있는 중립적인 문체와 호칭의 부재이다. 즉, 우리말이 앞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높이자니 말이 너무 길어지고 어색하고, 그렇다고 안 높이면 아주 깔보며 낮추는 말이 되어 버리는 딜레마를 극복해야 한다.

그 많은 2인칭과 3인칭 대명사 중에 당장 채팅 상대를 가리킬 때 쓸 you를 찾지 못해서 ‘님’ 자체가 2인칭 대명사가 되어 버렸고, ‘님들아’ 같은 이상한 말까지 인터넷으로 나돌고 있다. ‘그’는 어중간하게 he를 대체하고 있는 말이지만, 지시형용사로도 쓰이기 때문에 쓰임이 불완전하다. ‘그녀’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문제가 많은 말인데, 그럼 이만한 경제성과 보편성을 갖춘 대안은 무엇이 좋겠는가?

거기에다 ‘내’와 ‘네’의 청각적인 구분이 사라지는 문제는 우리말의 문제 중에서도 고전 축에 든다. 한 언어의 가장 기초인 인칭이 이렇게 불완전하고 쓰임이 어렵다면 누가 그 언어를 경쟁력 있다고 하겠으며, 영어가 오히려 편하다며 앞 다퉈 영어를 공용어로 쓰려는 회사들을 어떻게 저지하겠는가?

논리성의 결정체여야 하는 셈씨는 어떤가? ‘세 분’과 ‘삼 분’의 의미가 다르고 순우리말과 한자어가 뒤죽박죽 섞여, 쓰임에 원칙이 전혀 없는 우리말의 셈씨는 너무나 혼란스럽다. 비록 4까지밖에 해당하지 않지만, ‘한-하나’, ‘두-둘’처럼 영어와 달리 셈씨의 명사와 형용사 형태가 다른 것은 우리가 느끼지 못해서 그렇지 매우 큰 장점이다. 그 원칙대로 발전하여 순우리말 명사는 대명사로, 한자어 명사는 문자적인 숫자를 가리키는 명사로 쓰임이 굳어졌으면 매우 이상적일 텐데 지금 우리말은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0의 순우리말은 무엇이 좋을까?

한자어 숫자는 음절수가 짧아 경제적이라는 장점이 있으나, 청각적 변별력(1과 2, 3과 4처럼)도 따져 봐야 할 문제이다.

우리말을 개량하는 문제는 외래어, 외국 문자 문제보다 대단히 어렵다. 언어의 보편성을 거스르는 시도를 해야 하고, 문법을 바꿔야 하고, 새로운 말을 만들어서 써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리말의 문제들이 그렇게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수준이 결코 아니며, 우리말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꼭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말에 대해서는 충분히 살펴봤으니, 이제 초점을 한글에다 맞춰 보자.

4. 한글의 표의성을 강화하고, 한글의 단점은 한글로 해결해야 한다

한글 전용에 대해 잘못된 생각이 둘 있다. 첫째는 한글이 완벽한 문자이기 때문에 한글전용을 해야 한다는 것과, 둘째는 한글전용이 지금과 완전히 같은 표기법을 고집하며 한글을 쓰는 것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글이 체계가 대단히 과학적이고 문자의 본디 기능인 소리를 묘사하는 능력이 우수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글이 현대 문명이 필요로 하는 문자의 모든 기능을 충족할 정도로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게 사실이라고 해서 한글전용의 명분이 없어지는 건 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한글은 이대로 전용하더라도 실용적으로 편리하고 글을 읽는데 별 문제가 없지만, 한편으로 한글이 지금보다 더 발전하고 우리나라에서 문자가 쓰이는 모든 분야에서 완전한 주인 노릇을 하는 훈련을 시키는 바탕 역시 한글전용이라는 뜻이다. 왜 한글을 훈련시켜야 하냐고 이유를 묻는다면 이때 한글이 큰 잠재성을 가진 우리의 문자이며 보배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정답이다.

한글이 얼마나 더 나아져야 하는지 로마자를 예로 들어 본다. 로마자는 잠재적인 표음 능력은 한글보다 분명 한 수 아래지만, 서양인들이 이것을 얼마나 세련되게 갈고 닦아 왔는지는 한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배워야 한다.

먼저 대문자를 만들어 풀어쓰기의 단점을 상당히 해소하고, 대문자 약어는 일종의 표의문자 역할까지 해내고 있다. 거기에 로만체, 고딕체, 타자체, 필기체처럼 용도에 맞게 구분된 다양한 서체가 정착해 있다.

또한, 컴퓨터에서 다른 모든 문자들은 “진하게”와 “기울임꼴” 속성을 일반 글자 자형을 단순히 수학적으로 변형하여 구현하지만, 로마자만은 아예 이들 속성을 위해 별도로 제작된 글꼴을 쓰고 있다. 이것은 서양 사람들이 자기네 문자를 얼마나 창조적으로 활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이렇듯, 로마자는 오래 전부터 발달된 인쇄술을 바탕으로 활발히 쓰였고, 긴 시간 동안 맞춤법과 정서법은 물론, 자형학적 체계까지 완성되어, 글을 읽는 이의 시각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한글에도 한글에 맞는 강조법, 한글로 약어를 표기하고 컴퓨터로도 손쉽게 입력하는 체계, 컴퓨터 표기법 차원에서 고유명사의 변별, 모아쓰기와 풀어쓰기의 적절한 절충, 긴소리와 사잇소리 표기 같은 어려운 숙제들이 남아 있다. 이 모든 문제는 한글의 단점을 한글 단일 문자 체계에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한글 표기법을 개선하는데 한자가 동원된다면, 그것은 혼용이나 병용 차원보다 아래인, 특수문자나 기호 수준에 그쳐야 한다. 마치 at을 @으로, number를 #로 줄이는 것처럼.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한글은 소리글자일 뿐이기 때문에 그 자체에 뜻이 담겨 있지 않아 한자와의 혼용이 필요하다고 오해한다. 물론 우리말이 동음이의어들 때문에 소리 구조가 죽어서 한글의 표의성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말이 정상적이고, 그 말의 뿌리가 잘 드러나도록 맞춤법만 잘 만들면, 한글만치 소리와 뜻이라는 두 토끼를 잘 잡을 수 있는 문자는 없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세종대왕은 음성학자이기 이전에 국어학자였으며, 훈민정음의 그 많은 한글 낱자들은, 다양한 소리 자체를 적는 것보다도, 같은 소리를 말뿌리를 밝혀 달리 적기 위해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렇듯 한글의 표의성은 발음할 수 있는 소리의 개수 이상으로 무수히 글자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 예를 들어 요즘 인터넷으로 유행하는 “쀍! 아햏햏” 같은 단어에, 한자 못지않은 표의성과 함축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유행어는 표준 완성형 한글 코드로는 입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완성형 코드를 만든 사람들은 15년 뒤에 저런 유행어가 온라인으로 유행할 것이라고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조합 가능한 한글의 80% 가까이를 쓸 수 없는 과거의 완성형 한글 코드는, 한글의 잠재성을 처절하게 죽인 절름발이 코드 체계인 것이다. 지금 당장 쓰이지 않는 것을 아예 못 쓰게 고정시키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다.

저런 신조어가 나도는 것이 우리말에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또는 우리말이 영어 F 음운을 받아들이고 한글 맞춤법에도 F 소리를 적는 자음을 인정하는 게 바람직한지를 연구하는 것은 국어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한글 입출력을 컴퓨터로 구현하거나 한글 기계화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최대한 한글을 자유롭고 가볍게 쓸 수 있도록 연구를 아낌없이 해야 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한글을 사람들이 마음대로 표현하고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이 있어야 그 가운데서, 다양한 시도 가운데서 지금보다 더 나은 한글이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5. 맺음말: 열등감에서 자부심으로

우리가 한말글을 위해 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이미 인터넷을 정복한 영어, 기계에 명령을 내리는 수단으로 표준이 돼 버린 로마자를 한글과 우리말로 대체하려는 거창한 목적 때문도 아니다. 글자가 없는 나라에 한글을 보급하는 계획을 논의하기엔 도리어 우리 사정부터가 너무나 급하다.

우리 말글은 우리의 운명이며, 사고하는 수단이요 정보를 담는 그릇이다. 만에 하나 우리 말글이 언어적으로 기계공학적으로 외국어보다 열등한 것이 증명되었다 하더라도, 불편한 모국어를 개선해 가며 쓰고 외국어를 따로 배우는 비용은, 아예 외국어를 공용어로 삼음으로써 오는 기회비용과 민족적 수치심, 정서적 손실감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 말글을 끊임없이 갈고 닦고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말은 한 세기 전만 해도 국어사전은 고사하고 체계를 갖춘 정서법조차 없었다. 몇 백 년의 전통을 갖춘 사전을 가진 영어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구나 일제 강점기에, 지금 한글 학회의 모태인 조선어 학회가 헌신적인 노력으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완성하고, 최초의 국어사전인 우리말 큰사전을 완성했다.

한글 역시 550여 년 전에 창제되었으나, 한 나라의 주된 문자 노릇을 하며 활발하게 쓰인 지는 반세기를 갓 넘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미숙하고 불완전하다. 한글이 구조적으로 뒤떨어져서가 아니라 한글을 바탕으로 한 충분한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늦은 시작 때문에 지금 한글의 쓰임새가 로마자나 한자에 비해 다채롭지 못하고 뒤쳐져 보이는 것은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온갖 장애물을 제거하고 앞만 보고 뛰어도 시원찮을 판에, 한글, 더 나아가 우리말 앞에 놓인 장애물들의 벽은 높아 보이기만 하다. 지금 우리의 말글 정책을 책임지는 사람들은 선조들의 뜻을 제대로 이어받았는가?

우리는 한글날이 국경일로 제정된 적이 없기 때문에 승격시키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국경일로 잘 있다가 정부에 의해 격하당했기 때문에 싸운다. 그나마도 몇 년 전, 반민족적인 경제 단체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과학적인 세벌식이 표준 글자판이 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멀쩡히 잘 쓰이고 있던 세벌식이 군사 정권에 의해 말살당했기 때문에 명예 회복을 위해 싸우고 있다. 기가 찰 노릇이다.

10여 년 전 정부 기관에 의해 개정된 한글 맞춤법은 개정이 아니라 개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기관이 표준이라는 이름을 걸고 내놓은 국어사전이 너무나 부실하고 엉터리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리고 흔히들 영자 신문으로 영어를 공부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일간지로 외국 사람들이 우리말 공부를 과연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된 게 없어,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답답하고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세상 추세와는 역행하면서,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한글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은 나라 안팎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이 왜 희망을 버리지 않는가? 그것은 한글이 주는 매력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이런 보물을 물려받았는가 하는 자부심이다. 세상에 찌들지 않은 순수한 마음, 말글과 겨레를 위하는 마음, 진리를 탐구하는 마음으로 찾는 이들에게는 누구나 이 사실이 보인다. 그리고 거기서 솟은 자부심은 한글 사랑 정신으로, 또 이 정신은 우리말과 나라 사랑 정신, 자주 평화 정신으로 자연스레 이어져 왔다. 한글의 열매는 이렇듯 선하고 사람들을 올곧은 길로 이끌어 왔다.

이런 꿈그림을 품은 이들이 힘과 뜻을 모아 각자 맡은 곳에서 우리 말글을 낫게 하려는 노력을 계속할 때, 언젠가는 그 뿌린 씨가 열매를 거두어 말글 정책을 바꾸고, 잘못 정해졌던 표준을 바꾸고, 우리의 말과 글과 얼이 진정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날이 오리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그날을 멀리 바라보며,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에서도 헌신하신 선배들을 기억하며, 오늘도 뛰어야 한다.

2004년 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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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음권㉨1967- 전국 국어운동 대학생 동문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