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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대로 2017년 04월 04일 12시 16분에 남긴 글입니다.
2000년에 박한용 박사가 쓴 글 - 문민정부와 국민정부


문민정부는 영어, 국민정부는 한자 섬기기?

                                                        빅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작년 초 단계적인 한자병용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려고 했던 걸까. 그는 취임 1주년 기자회견장에서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쓴 연설문을 만들어 기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한글 전용 정책 이후 최초로 국한문혼용체의 정부 공식문건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이제 정부의 한자병용정책은 실제 진행되고 있다. 우리 말글살이에 엄청난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이와 함께 한쪽에서는 이에 질세라 영어공용화의 구호가 요란하다. 한마디로 영어와 한자만이 21세기 우리 민족이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김영삼 정권은 국제화·개방화를 선언하고 영어와 컴퓨터가 국제화의 유일한 길 인양 목 놓아 외쳤다. 효과는 빨랐다. 영어 조기교육 열풍이 몰아치면서 강남의 유치원생들 가운데 ‘샘’이니 ‘밥’이니 영어 애칭을 가진 아이들이 생겨났다. 이왕 배울려면 철저하게 어릴 때부터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생활하고 영어로 말하는 것-할 수만 있다면 미국에서 키워야 하지만-만이 영어를 배우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 결과이다. 어느 텔레비전 방송국은 아예 고등학생들이 영어로 듣고 영어로 말하는 퀴즈프로그램까지 마련하였다.
   그뿐인가. 십대들을 노리는 대중가요에는 의례 영어 가사가 들어가야 한다. 미국 한인사회의 자녀들이 그 유창한 영어를 가지고 “본토”에서 배운 “랩송”의 진수를 보여준다며 돌아오고 있다. 영어를 잘하면 대학 입학도 쉽다더라, 우리말도 시원찮은 어린아이들까지 영어를 배운다고 조기유학의 열풍이 몰아치고 있다. 영악한 지식인들은 한술 더 떠 무한경쟁의 국제화시대를 맞이해서 한국어는 경쟁력이 없다, 유창한 영어를 사용하기 위해 영어를 공용어로 하잔다. 조기유학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묘책이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이른바 문민정부의 말글살이 정책은 “영어의 토착화”였다.

  문민정부의 영원한 맞수 국민정부가 어찌 이에 뒤지겠는가. 영어는 이제 우리 사회에 자리 잡았으니 동아시아식 국제화를 위해 한자도 집어넣자고 나온다. 나발은 문화관광부에서 먼저 불었고, 김대중·김종필 등 정권 책임자들이 박수를 치며 전도를 하고 다녔다. 문화관광부가 겉으로 내세운 논리는 단순하다. 일본인 관광객을 보다 많이 불러들이기 위해 한자를 함께 사용하잔다. 한문과 일본어에 익숙한 노인 정치꾼들이 여기에 맞장구치고 조선일보는 전통문화의 보고인 한문고전을 읽기 위해 한자를 배우자고 맞불을 질렀다. 편협한 국수주의에 빠지지 말자는 어른스런 충고 또한 잊지 않았다.
  아이엠에프 벼락을 맞은 우리 국민들도 이제 될 대로 되어라다.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을 재빨리 안 받은 바람에 외환위기를 맞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제 정신을 잃은 상태이니,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남의 나라 글자를 모국어로 쓰자는 주장에도 아무런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영어공용, 한자병용이 출세의 지름길이라면 열심히 적응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으로 가버렸다. 그러나 체념하기 전 한 번 더 생각해보자. 영어 공용, 항자병용이 과연 우리의 살길인지를, 그 속에 강대국의 음흉한 함정은 없는지를.

  김대중 정부의 한자 병용론은 결코 김대중정 권의 구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이 외환위기를 당한 후 일본 측의 일방적인 요구에 한국 정부가 따른 것이다. 여기에 한자에 익숙한 보수세력이 한자 병용의 전위로 나섰을 뿐이다. 분명 국제화는 하나의 경향이다. 동아시아의 지역 간 협력과 상호의존이 커지는 것은 사실이며, 인터넷은 이 경향을 더욱 빠르게 하고 있다. 이때 동아시아권에서 영어 외에 또 다른 언어를 제2의 문자 소통수단으로 쓸려고 할 때 자연 한자를 공용문자로 사용하는 문제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한국, 중국, 일본이 한자문화권이라고 하지만 사실 세 나라의 한자나 글살이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우리의 경우 한글이 글살이의 뼈대를 이루고 있으며, 어린 세대로 내려가면 한자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실정이다. 중국은 복잡한 고전한자를 버리고 이를 간략하게 한 ‘간자(簡字)’를 사용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한자를 거의 쓸 줄 모를 정도로 간자가 일상화되어 있다. 일본은 가나문자가 있지만 실제 한자에 거의 의존하고 있다. 오랜 동안 한자를 사용하면서 일본만의 독특한 한자가 만들어 졌고, 한자의 뜻도 중국이나 우리와 다르게 새기는 경우가 많다.
  세계 최대의 인구와 화교를 배경으로 한 중국의 간자와 정보력과 경제력을 앞세운 일본의 한자문화가 동아시아 문자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동안 두 나라는 각자 한자를 정보화(전산처리)하기 위해 엄청난 인력과 경비를 쏟아 부었다. 이제 동아시아 내의 공통 의사수단을 정할 경우 중국과 일본은 자국의 간자(한자)가 사용되기 위해 갖은 외교를 펼칠 수밖에 없다. 이에 일본은 한국 정부에 한자병용을 요구했고-한국과 일본은 고전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 정부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한자병용정책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일본의 고무라 외상이 한국에서의 한자병용정책은 일본식 한자 표기로 해 달라고 주문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한자병용은 아이엠에프 협약의 부속 조항에서 한국 정부가 약속한 일본 대중문화의 즉각 개방과 함께 일본의 문화 제국주의 확장 의도와 맞물려 있다.
  일본식 한자를 우리가 쓸 경우 우리말글살이 또한 혼란에 빠질 것은 뻔하다. 일본어 한자는 겉으로 보면 우리 한자와 같기 때문에 외국어로 전혀 인식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십대들이 즐겨 본 “원령공주”라는 일본 만화영화를 보자. 원령은 도깨비의 일본한자 표현으로 もののけ라고 읽는다. 그러나 원령이 한자어이기 때문에, 이를 도깨비 또는 모노노께가 아니라 우리 식으로 음독을 해 원령공주라고 희한하게 번역했다. 만화영화 “천공(天空)의 성 라퓨타”도 천공은 하늘(ソラ)의 일본한자인데 “하늘의 성 라퓨타”가 아니라 “천공의 성 라퓨타”로 일본말도 우리말도 아닌 엉뚱한 단어가 만들어지고 있다.

  어쨋든 한자를 배워 놓으면 우리말이 한자어가 많으니 우리말 사용에 도움이 되지 않느냐고 되물을 수 있다. 나아가 우리 고전 문화의 대부분이 한자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한자 병용은 “민도 향상”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고 한다.
  그럴 듯하지만 사실은 한심한 논리이다. 그 쉽다는 한글도 2,3백년만 거슬러 올라가면 일반인들은 읽기 어려운 판에 사서삼경이나 중국 옛 역사를 줄줄이 꿰어야 읽을 수 있는 한문고전을 위해 한자를 배우자고! 아설 일이다. 차라리 지식의 대중화를 위해 한글로 번역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번역을 하다보면 우리의 말글 또한 더욱 풍부하고 아름답게 가꿔질 터이니 누이 좋고 매부 좋다. 더욱이 한글이 정보화시대에 걸맞는 우수한 문자임에랴!
  한글 정보화사업에 종사하는 업체 가운데 중국이나 일본의 복잡한 한자 입력체계를 한글을 이용해 간단하고 편리하게 바꾸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남의 나라 글자마저 우리 한글을 이용해 편리하게 정보화할 수 있을 정도로 한글의 가능성은 밝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한글을 오히려 21세기 정보화시대의 미운 오리새끼 취급을 하고 있다. 일본제국 시대부터 한자와 일본어에 더 익숙한 낡은 세력들이 정권을 쥐고 이런 짓을 하고 있다.
  한글이 만들어 진 후 조선의 양반들은 지식을 독점하기 위해 한문만을 섬기고 한글은 외면했다. 지배층으로부터 버림받은 한글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민중들이 실제 생활에서 편리하게 느끼고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그 “무식한” 민중들이 약 300년간 한글을 사용하면서 조선 후기에는 한글문학작품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고 “실용한글”은 “문화한글”의 수준으로 발전했다. 한자문화에 찌든 지식인이 아니라 노동하는 민중들이 지키고 가꾸어 온 글! 그게 바로 한글이다.
그러나 일제의 한반도 침략에 의해 36년간 우리말과 우리글이 탄압을 받음으로써 한글은 겨레글로 자리 잡지 못하고 대신 일제 식민지 노예문화와 일본어가 우리 사회에 뿌리깊이 자리 잡았다. 해방 후 우리말과 글의 정체성조차 확보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시대의 일본어에다 영어가 덮어 씌어지고 여기에 다시 한자마저 부활시키려는 21세기의 문화적 광란을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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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음권㉨1967- 전국 국어운동 대학생 동문의 집